무한한 사랑은 없거든요
"사랑이 아닌 단어로, 사랑을 말해 주세요."
좋아하는 노래 중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그 눈빛에 다 보이게, 우리만 아는 암호로 사랑을 말해달라는 가사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노래를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위로 같아서.
사실 조금은 쓸데없고 어쩌면 싱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말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 그게 사랑이었구나' 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밥 먹었냐는 인사가 그렇다. 철이 들기 전에는 (그렇다고 지금도 딱히 철이 든 것 같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밥 먹었냐는 질문에 드물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밥이야 때 되면 먹는 걸 알면서 대체 왜 물어보지? 특히 중고등학생 때에는 정해진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다는 걸 모르시는 게 아닐 텐데 퇴근하고 오셔서 나에게 하는 첫 질문이 왜 '점심은 맛있게 먹었어?' 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대체로 당연히 먹었지, 하고 답하는 질문이었지만 괜히 심술부리고 싶은 날에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가 아니라 '어, 밥 먹었나?' 하며 전화를 받으시곤 했다. 오전에 전화를 걸어도, 늦은 오후에 전화를 걸어도, 저녁때가 다 지난밤에 전화를 걸어도 열에 아홉은 그렇게 받으셨다. 경상도 분이시기도 하고 조금 무뚝뚝하셨던 분이라, 무심한듯한 인사가 처음에는 약간 섭섭하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밥 먹었냐는 그 인사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여보세요, 하고 받으시면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이 '밥 먹었냐'는 인사가 사랑이구나, 싶었던 건. 그 한 마디에는 별일 없냐는 안부 인사가 있었고, 혹시나 식사를 하지 못하거나 거를만한 일이 있지는 않은가에 대한 걱정이 있었고, 타지에 있어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는 딸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걸 깨닫고 난 뒤의 나에게 부모님의 밥 먹었냐는 인사는 사랑한다는 말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똑같이 밥 먹었냐는 인사로 같은 의미를 돌려드리기에는 감히 깊이가 다른 그런 말.
그렇게 부모님을 시작으로, 조금씩 나이가 들고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들을 어느 정도 배웠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 입덕을 했다. 친구, 연인, 사제지간, 선후배 등 여러 종류의 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애정에 대한 경험은 꽤 했다고 느끼던 이십 대 후반에 만난 팬과 연예인이라는 새로운 관계는 또 나에게 새로운 사랑 밖의 단어들을 알려주었다.
I가 속한 그룹 X에는 M이라는 멤버가 있다.
내가 I에게 입덕을 하고 그룹 X를 알아갈 때에 M은 이미 군입대를 한 상태였고, 내가 M을 알아갈 수 있는 어떤 재료들은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아이돌 그룹 덕질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아이돌 그룹은 멤버들의 관계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뭉칠수록 살고, 흩어지면 위기를 겪는다. I를 알기 위해 보기 시작한 과거의 영상들에는 당연히 멤버들이 함께일 수밖에 없었고, I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연스럽게 같은 그룹의 멤버들에 대한 애정 또한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당연히 I뿐만 아니라 모든 그룹 X의 멤버들을 응원하고 아끼지만, 그 멤버들 중 그의 언어를 가장 마지막으로 이해하게 된 멤버가 바로 M이었다.
M은 쉽게 말해 MBTI에서 말하는 T형, 즉 사고형 인간이다. 그것도 극도의 T형 인간. 태생이 감정형 인간인 나와는 단순히 생각하면 정반대에 있는 성향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우울해서 염색했어"라는 말에 왜 우울했냐는 답을 받아야 어떤 마음을 느끼는 사람인 나에게 M은 늘 무슨 색으로 염색했는지를 궁금해하는 타입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입덕 초기에 어떤 영상에서든 M이 하는 말들을 들으면 '대체 왜 저렇게 얘기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 날 것으로 느껴지는 M의 말과 문장들이 너무 차갑게만 느껴졌던 탓에.
그런데 분명 M의 말에서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어떤 말 사이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한 것도 잠시, 나에게도 조금씩 M의 마음이 가까워 오기 시작했다.
M은 사소한 주제에서도 본인과 의견이나 취향이 다르면 단호하게 본인을 주장했다. 예를 들면 콩국수에는 무엇을 넣어 먹느냐 같은, 누군가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주제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M을 잘 아는 팬들이 일부러 '콩국수는 소금이야' 같은 닉네임으로 사연을 보내면 M은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콩국수는 설탕이죠' 하며 팬들과 귀여운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저게 뭐 별 거라고 그냥 그렇구나 할 수도 있을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에피소드들이 하나, 둘 쌓이다 보니 M이라는 사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내가 차갑다고 느꼈던 그 말들은 대부분 미사여구나 돌려 말함이 없는 담백한 문장들이었다. 꾸밈이 없다고 해야 하나. 마음에 없는 말은 빈말이라도 잘하지 않는, 그래서 모든 말들이 진심임을 끝내 깨닫게 하는 사람이 M이었다. 흔히 한 번 더 생각했을 때 그 문장만으로 진짜 의미를 깨닫게 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말들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에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직관적인 문장들. 그것이 M의 말들이었다.
그런 M의 말들이 끝없는 진심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건, M이 진행하던 방송에서 했던 이 말이 가장 큰 계기일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위해서 데뷔해서 노래하고 가수를 했는데 진짜 팬 분들은 무한한 거야, 이게. 이유가 없는 거야. 무한한 사랑은 없거든요. 왜냐면 혼자서만 주다가는 지치기 마련이야. 근데 팬분들은 주기만 한단 말이지. (중략) 근데 진짜 무한한 사랑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없어요. 그렇지만 팬분들은 이유 없는 사랑도 주신단 말이죠. 말이 안 되는 거야. 우리는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걸 했을 때 나도 같이 성취감을 느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되면 서로 지치지 않고 시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210218 네이버나우 보그싶쇼)
아, 이 사람은 팬과 연예인이라는 이 관계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감정의 불균형을 이해하고 있구나. 어쩌면 의도치 않게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을 맞이할 팬들의 마음을 알고 있구나. 그러니 오히려 더 꾸며내지 않고, 필요한 만큼 덜어내서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문장으로 마음을 전달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M의 모든 말들이 내 마음에 밀물처럼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 M의 말대로 시너지를 얻었다. 팬들이 보내는 마음에 답하려는 노력의 결과물들이, 그 결과물들에서 M이 얻는 성취감과 팬들의 행복이 무한한 마음의 사이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저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저는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뭔가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거나, 그래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나 일들은 기억을 하려고 많이 노력해요. 아무래도 저는 사랑받는 직업이다 보니까, 사랑받으려면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주변을 잘 돌아볼 줄 알아야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노력을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언제든 노력을 해야죠. (210929 네이버나우 보그싶쇼)
언젠가 I가 했던 인터뷰에서 M에 대해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없고 진중한 형'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향적인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M이 출연하는 방송에서는 오디오가 비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정말 말이 많은 사람이거나 말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 또한 자신을 보고 있는 팬들을 위한 노력이었을까.
M이 스스로의 마음을 전할 때, 담백하면서도 직관적인 문장이 온도를 얻어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닿기까지의 사이에는 늘 그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고민한 M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많은 순간 그 시간들을 되짚어 누군가를 위해 기억해야 할 순간들을 새겼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시간을 통해 채워낸 어떤 빈틈도 없는 가장 간결하고 곧은 모든 문장들이 M이 보내려 노력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 어느 날부터 M의 문장들은 가장 따뜻하고 깊은 바다가 되었다.
'사랑'이 아닌, 사랑 밖의 말들로 사랑을 말하려면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부모님의 밥 먹었냐는 인사도, M의 직관적인 문장들도 모두 서로에 대한 이해와 마음 위에 사랑을 피워낸다. 그러니 세상 어떤 단어를 가져다 놓아도 그 단어들 사이에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 함께한 시간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 단어가 상대방에게 가 닿을 때에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그 사이에 어떤 마음이 사그라들어 그 말들이 빛을 잃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사랑 밖의 모든 말들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기억들은 오래도록 남아 더 많은 사랑을 알려 줄 것이다. 나는 이런 말로도 사랑을 받았다고, 그래서 나 또한 사랑 밖의 어떤 말로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거라고.
'고래'라는 단어 하나에도 누군가를 떠올리며 웃음 짓게 되는 날들을 기꺼이 맞이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