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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플스호텔 옆이 우리 오피스라니

by 에리카
일단은 가장 중요한 집부터 구하자

회사에서는 입국한 후에 집을 구할 때까지 오피스 근처의 칼튼 호텔에서 2주 동안 지낼 수 있도록 숙소를 제공받았다. 2주가 긴 시간 같아도 집을 구하려면 사실 부족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래도 정말 운 좋게도 싱가포르의 한인 커뮤니티인 '한국촌'이라는 웹사이트에서 룸메를 구한다는 글을 보고 찾아간 두 번째 집을 바로 계약하게 됐다. 처음 찾아간 집은 가족이 사는 집에 방 하나를 렌트해준다고 하는데, 방이 아무리 맘에 들어도 역시 가족과 사는 건 좀 불편할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찾아간 집은 싱가포르의 이스트에 있는 정말 현지인들의 거주지역인 탬피니즈 Tampines라는 동네에 있는 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싱가포르의 주공아파트 개념)였다. 싱가포르인 아주머니와 여동생이 함께 살면서 방 하나는 렌트를 한다고 했다. 그 방을 함께 사용할 한국인 룸메가 한국촌에 글을 올린 거였는데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집도 아니고 방을 함께 사용하는 건 꽤나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쿄에서도 함께 살았던 룸메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 절친이 되었었던 경험이 있고, 나름의 '나는 인복이 있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또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싱가포르 생활을 함께 지지해주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사이가 되었다.


방 하나를 렌트하는데 비용은 싱가포르 900달러였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시내에서도 엄청 떨어진 외곽인 데다 다른 부대시설이 있는 콘도도 아닌 HDB의 방 하나를 900달러에 렌트한 건 비싸게 계약한 거였다. 그걸 둘이서 나누어내니 각각 450불씩(약 한화 39만 원 정도)이라 그나마 덜 부담이 됐지만 그래도 웬만한 지방에서는 혼자서 원룸을 빌릴 수 있는 돈을 방 하나를, 그것도 룸메와 함께 쓰는 비용으로 내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그래도 마음 잘 맞는 자매처럼 지낼 수 있는 룸메와 재미있게 같이 사는 즐거움이 있었다.


외국생활에서 마음 편하게 내 몸 하나 쉴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운 좋게도 두 번째로 보러 간 집을 바로 계약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 이제는 마음 놓고 여기저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일기 같은 그때의 기록. 이렇게 남겨두면 나중에 보는 재미가 있다




출근 길이 바로 여행길

나는 싱가포르에 취업을 하기 전, 싱가포르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사실 부끄럽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인지도 잘 모르고 있던 상태. 그저 리쿠르터인 야노 상에게 "참 깨끗하고 치안이 좋아서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요."라고 소개를 들었던 게 첫인상이랄까. 그리고 인터뷰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야노 상이 보내주신 회사 소개가 담긴 자료와 내가 지원하게 될 포지션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서 구글 스트리트 뷰로 오피스 주소를 검색해봤다. 그렇게 해서 본 뷰가 바로 내가 접한 싱가포르의 첫 얼굴. (그나저나 세상 참 좋아졌다)

구글 스트리트 뷰로 본 첫 싱가포르 (가림막을 보니 공사 중일 때 찍혔나 보다)

그런데 비치로드에 있다는 이 오피스를 검색하니 아니 이게 웬일, 도로에 푸릇푸릇한 저 나무들은 뭐죠.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겨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 옆을 쭉쭉 내려가면서 보니 웬 멋진 유럽풍 건물이 있어 검색해보니 래플스 호텔이라는 곳으로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이라고 한다. 전 객실이 스위트룸이라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왕비 등 VIP가 오면 묵는 곳이라고.


덕분에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싱가포르의 전철인 MRT의 시티홀 역에 내려 오피스로 걸어서 출근하는 길이 매일매일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호텔의 마당에는 발리, 싱가포르처럼 열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예쁜 꽃, 플루메리아 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그 앞의 인도에 항상 꽃잎들이 다소곳이 떨어져 있었다.


그 길을 지나오면서 아침마다 꽃을 하나씩 주워다 내 책상의 컴퓨터 위에 올려두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진짜 싱가포르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들었다. 서울에서 출근할 땐 지옥철 2호선을 타고 오면서 한껏 쭈그러든 몸을 펼 새도 없이 논현역에 내려 사람들의 엄청난 걸음속도에 떠밀리듯이 정신없이 걸어가곤 했는데 말이다. 여유로운 아침 출근길만으로도 나는 이미 행복했다. 게다가 싱가포르의 MRT는 엄청나게 붐비는 러시아워라고 해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실 귀여운 수준이다.


싱가포르 동료들이 가끔 아침 출근길에 대해 불평을 할 때면 마치 "라테는 말이야~" 꼰대 상사가 된 마냥 "서울에선 말이야~"라고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실제로 몇몇 동료들이 서울 여행을 다녀와서는 이젠 이해가 간다며 웃곤 했다.


자동차 모임 중인 것 같았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지만 찍는다

남들은 여행으로 와서 일부러 기념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유명한 호텔을 매일 출퇴근 길로 지나다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샌가 일상적인 풍경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이벤트가 열리거나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실사판처럼 호화로운 행사들이 열리는 날이면 다시금 여기가 그 유명한 래플스 호텔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샌가 구글 스트리트 뷰로만 보았던 푸릇푸릇한 야자수가 가득한 푸릇푸릇한 그 도로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예쁜 꽃을 발견하면 주워 들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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