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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세계의 탄생 - 최초 시작점 작성의 정리

by 김동은WhtDrgon

1. 모든 것은 역할에서 시작된다: 페르소나와 부캐의 시대


우리 인간은 단 하나의 얼굴로 살아가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하며 살아간다. 최소한 어머니의 자녀라는 역할로 시작하여, 학생, 친구, 연인, 그리고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상황과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가면을 쓰고 벗는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역할 이론(Role Theory)’이라 부르며, 개인이 사회 구조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 양식을 수행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본이라 설명한다.


과거 이 역할들은 반드시 육체의 도움을 수반했다. 교복을 입고 학교라는 장소에 가야 학생의 역할이 완성되고,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 출근해야 직장인의 역할이 성립되었다. 이처럼 복장과 장소에 의해 물리적으로 구분되었기에,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자아를 역할(Role), 페르소나(Persona), 가면(Mask)이라는 표현으로 불러왔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단 하나의 ‘진짜 나’, 즉 물리적 육체가 존재했다.


하지만 온라인 시대는 이 모든 전제를 뒤흔들었다. 디지털 공간에서 우리의 페르소나는 ‘계정,ID’이라는 새로운 육체를 얻어, 현실의 나와는 독립적인 활동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부캐(부캐릭터)’가 온라인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예술과 방송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작가들이 필명을 사용하고, 가수들이 예명을 쓰며, 코미디언이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등 부캐의 전통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은 이 부캐의 창조와 운영을 모든 개인의 일상으로 확장시켰다. n잡 시대와 긱 이코노미의 도래는, 한 사람이 가졌던 직장인/직능인 캐릭터의 의무를 여러 개의 전문화된 부캐에게 분할시킴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2. 역할이 모여 이웃이 될 때: 커뮤니티의 재해석


이 수많은 역할과 캐릭터가 진정한 힘을 가지는 순간은 바로 집단을 이룰 때이다. 직장에 수많은 직장인 캐릭터들이 모여 조직 문화를 형성하고, ‘맘카페’에 수많은 ‘맘’이라는 역할의 사람들이 모여 강력한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듯, 공통의 역할을 가진 캐릭터들이 모이면 그들은 서로에게 ‘이웃’이 된다.


이 지점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오래된 경전의 황금률은, 온라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 디지털 세계에서, 나의 ‘이웃’은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의 ‘몸’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내 역할(캐릭터)이 바로 내 몸이며, 내 역할이 속한 커뮤니티가 바로 내 이웃이다.


내가 ‘열혈 게이머’라는 캐릭터로 활동하는 게임 커뮤니티의 다른 게이머들이 나의 이웃이며, ‘초보 부모’라는 캐릭터로 정보를 나누는 육아 커뮤니티의 다른 부모들이 나의 이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감상적인 애정을 넘어, 그들의 역할을 나의 역할처럼 존중하고, 같은 캐릭터로서 동등하게 대우하며 함께 상호작용하는 ‘롤플레잉(Role-Playing)’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사회학의 ‘상징적 상호작용주의(Symbolic Interactionism)’가 설명하듯, 우리는 공유된 상징(역할, 은어, 밈)을 통해 서로의 의미를 해석하고 사회적 실재를 함께 구성해 나간다.


3. 이웃이 사는 공간, '들어가고 싶은 세계'의 탄생


이처럼 공통의 역할을 가진 이웃들이 모여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곳, 그것이 바로 커뮤니티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커뮤니티의 관계망과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 즉 그들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공간화한 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다.


여기서 세계관 창작의 가장 중요한 대원칙이 드러난다. “세계는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등장인물이 필요하다는 뜻을 넘어선다. 아바타(AVATAR)의 본래 산스크리트어 의미가 ‘강림’ 즉, 신(神)이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 사용하는 인간의 육체(화신)를 의미하는 것처럼,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조차도 특정 세계에 들어가려면 그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캐릭터가 필요하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용자는 말할 것도 없다.


유니버스든 메타버스든, 어떤 세계를 만들려거든 반드시 사용자가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캐릭터’, 즉 새로운 몸과 역할을 제공해야만 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의 게임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면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자신만의 캐릭터를 생성하는 훈련이 되어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내가 호그와트에 입학하면 어떤 기숙사일지”를 상상하는 것은, 단순히 해리 포터라는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을 넘어, 나 자신이 그 세계의 새로운 ‘주민’이 되기를 갈망하는 행위다. 주민이 된다는 것은 ‘내가’ 직접 스톰트루퍼, 제다이, 마법학생의 역할을 맡아 롤플레잉을 하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의 표현이다. 인물이입욕구와 세계편입욕구를 구분해야한다. 세계관은 세계 편입 욕구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따라서 세계관을 만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독자나 사용자가 들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역할, 즉 캐릭터의 가능성을 설계하는 일이다. 세계관의 세계가 매력적이라는 찬사는, 곧 ‘내가 저 세계로 나의 캐릭터를 가지고 들어가고 싶다’는 갈망의 다른 표현이다.


4. 세계관과 스토리, 그리고 메시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토리와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해야 한다. 스토리는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인물의 타임라인’일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무수한 가능성 중 단 하나가 실현된 기록에 불과하다. 물론 그 ‘어떤 인물의 타임라인’이 너무도 중대하기 때문에, 마치 세계 전체가 그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타임라인이 없다면 세계는 멸망하거나 암울한 비극 속에 잠길 것이기에, 주인공의 영웅적인 서사가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세계관은, 그 특정 ‘스토리 타임라인’이 시작되기 전부터, 혹은 그것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 자체로 매력적이어야 한다. 세계관은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스토리의 가능성을 예고함으로써 독자를 두근거리게 만들어야 한다. 즉, “더 들여다보고 싶은 세계, 들어가보고 싶은 세계”여야만 하는 근본적인 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이 가진 힘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메시지와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무려 하나의 세계 전체를 창조하고 동원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반드시 사용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가지고 기꺼이 이주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어야만 한다.


5. '부캐가 돈을 버는 세계'로서의 메타버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메타버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몰입감 높은 3D 그래픽이나 VR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메타버스는 바로 앞서 정의한 ‘들어가고 싶은 세계’가 자생적인 경제 시스템을 갖추게 될 때 완성된다. 즉, 동질적, 유사적, 순환적 캐릭터(이웃)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그 안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현실 세계의 경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서 캐릭터들은 ‘관광객’과 ‘주민’으로 나뉜다. 관광객은 외부 세계의 가치(돈)를 가지고 들어와 세계 내부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떠난다. 반면, 주민은 이 세계 안에서 직접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자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계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종종 일치한다는 것이다.


“작가들로만 구성된 세계의 작가 주민들이 서로의 작품을 사들이는 세계”가 된다. 주민들은 서로의 창작물을 소비하고 칭찬하며(상호 가치 부여), 이를 통해 내부 경제를 활성화하고 세계관 전체의 가치를 키워나간다. 이렇게 내부에서 축적된 가치와 콘텐츠는, 다시 관광객들에 의해 외부 세계(현실)로 알려지고 판매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캐가 돈을 버는 세계’가 탄생한다. 디지털 세계의 캐릭터(부캐)가 창출한 경제적 가치가, 현실 세계의 육체를 먹여 살리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메타버스의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정의다.


6. 창조의 시작: 날카로운 시드와 6개의 경로


이 거대한 여정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세계관 시드 시트(Universe Seed Sheet)’에서 시작된다. 시드는 당신의 세계가 가진 차별성이자 차이점이며, 반드시 세계 전체를 끌고 갈 정도로 충분히 날카로워야만 한다.


세계관은 세계관 시드 시트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데, 법칙, 장면, 캐릭터, 키워드, 스토리, 장르와 분위기. 이 6개 씨앗 중 무엇으로든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그 시드은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33살에 죽는다면?"과 같은 독특한 법칙일 수도 있고, "거대한 고래의 등 위에 세워진 도시"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강렬한 장면일 수도 있다. 또는 "은퇴한 암살자 할머니"처럼 매력적인 캐릭터, "사이버펑크 무당"과 같은 익숙한 키워드의 신선한 조합, 흥미로운 스토리, 혹은 특정 장르의 분위기 그 자체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익숙한 키워드'의 신선한 조합에 유의하자. 세계는 익숙해야한다. 주석으로 가득 찬 설정은 세계관이 아니다. 비유는 더 쉽게 이해를 돕기위한 것으로 시작해서 교리의 전문 지식체계가 되지만, 시드 단계에서부터 전문용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구성되는 키워드는 Tropes 나 클리세에 준하도록 반드시, 적어도 인접 세계관(서브컬처, 혹은 팬덤 등 내 세계관이 인접한 다른 세계관)의 주민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여야 한다.


법칙은 그 세계와 현실의 차이를 규정하는 절대적 선언의 장치로 독자가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장치이다. 이 법칙은 설득이 필요없다. 가령 이 세계에 마법이 있다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이 존재한다’는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 서술일 뿐, 세계를 만드는 시드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엣지가 없다. 차라리 “위치크래프트라는 마법은 오직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만 계승되지만, 딸이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대가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잃어버린다”가 훨씬 더 강력한 시드가 된다. 이 하나의 법칙이 사랑과 힘 사이의 끔찍한 딜레마라는, 무한한 드라마의 가능성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법칙이 확립되는 순간, ‘마법을 쓸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강력한 ‘스토리’의 영역이 된다.


이처럼 법칙, 장면, 캐릭터, 키워드, 스토리, 장르와 분위기라는 6개의 씨앗 중 그 무엇으로든 시작할 수 있다. 하나를 정했다면, 나머지 부분들을 차례차례 채워 여섯 요소가 모두 조화(하모니)를 이룰 때, 당신의 세계는 비로소 핍진성 있는 기초 도형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갖추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AI에게 이 글 전체를 복사해넣고 "이 글에 의거하여 'Dog'으로 세계관 시트 하나 짜줘." 라고 하면 그자리에서 만들어준다.


그럼 이 글을 읽고 세계관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야할 "절대 시드"는 무엇인가?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바로 ‘메시지’다. 세계를 만드는 것은 오직 메시지다. 이 강력한 메시지가 캐릭터를 규합하고, 무리(커뮤니티)를 만들며, 경제(이코노미)를 흐르게 하여 생존과 번영을 만들어낸다.


즉,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In the beginning was the Word/Logos)’는 오래된 경전의 구절처럼, 하나의 강력한 말씀(Logos)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세계를 창조하고,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오는 수미상관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계관 작법의 본질이다.


원래 정치, 민족, 종교, 팬덤이 모두 이 ‘말씀’ 위에 세워진,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세계관 기반 사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런 경로와 흐름 때문에 세계관이 IP, 팬덤, 브랜드, 아이덴티티, 조직화, 교세확장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김동은@MEJE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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