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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창작의 벽을 넘는 기술: 전사, 비밀, 후크

by 김동은WhtDrgon

19-1. 작가의 머릿속을 데이터베이스로: IP 자산화와 위키 구축

위대한 세계관은 한 명의 천재적인 창작자 머릿속에서 탄생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머릿속을 나와야만 한다. 아이디어는 휘발성이 강한 기체와 같다. 기록되지 않은 영감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체계화되지 않은 설정은 내부 모순에 부딪혀 스스로 붕괴한다. 더 나아가, 협업이 필수적인 현대 콘텐츠 산업에서 오직 창작자만이 알고 있는 ‘암묵지(Tacit Knowledge)’는 공유될 수 없는 자산, 즉 자산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전문적인 세계관 구축의 첫걸음은, 창작자의 머릿속에만 흩어져 있는 아이디어의 파편들을 누구나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체계적인 데이터로 전환하는, 즉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 재산) 자산화’의 과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는 메모 행위를 넘어, 당신의 세계관을 측정하고, 분석하며, 증식시킬 수 있는 견고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공학적인 작업이다.


메제웍스(주)의 전문적인 프로세스는, 아이돌 팬덤의 언어를 분석하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어떻게 막연한 문화 현상이 구체적인 IP 자산으로 변환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7단계 공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계관이든 체계적으로 자산화하는 방법론을 배울 수 있다.


1단계: 데이터 수집 (크롤링과 유입 채널 확보)
모든 것은 원재료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팬덤 분석의 경우, 그 원재료는 팬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먼저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에 공식 계정을 만들고, 분석하고자 하는 세계관의 핵심 해시태그(예: #배너, #VVS)를 시드(Seed)로 삼아 데이터를 수집(크롤링)하기 시작한다. AI는 이 시작점을 중심으로, 팬들의 ‘리트윗’과 ‘좋아요’ 패턴을 분석하여 네트워크상의 영향력 있는 인물, 즉 ‘전파자’를 식별한다. 이렇게 식별된 핵심 유저들이 바로 지속적으로 양질의 데이터를 공급해 줄 ‘유입 채널’이 된다. 당신의 세계관이 오리지널 창작물이라면, 이 단계는 당신이 영감을 받은 모든 작품, 관련 서적, 역사 자료 등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여 하나의 폴더에 모으는 작업에 해당한다.


2단계: 키워드 라이브러리링 (데이터에서 키워드 추출)
수집된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 속에서 의미 있는 단어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AI는 이 데이터 뭉치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특정 단어들과 강한 연관성을 보이는 단어들을 ‘키워드 후보군’으로 뽑아낸다.

팬들이 “우리 오리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한 번 쓴 것은 의미 없는 노이즈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반복해서 사용하고, “초록 오리 왕자님”, “닭벼슬 오리 왕자님”처럼 변주하여 사용하기 시작하면, AI는 이것을 유의미한 키워드로 인식하고 가중치를 부여한다. 이 단계는 아직 자동화의 영역이지만, 사람의 개입이 필요하다. AI가 뽑아낸 후보군들 중에서 정말로 의미 있는 키워드인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걸러내는 것은 인간 큐레이터의 몫이다.


3단계: 키워드 글로서리 작성 (데이터에 의미 부여)
추출되고 선별된 키워드들은 이제 단순한 단어 목록을 넘어, 체계적인 정의가 부여된 ‘키워드 글로서리(Keyword Glossary)’, 즉 용어집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IP 자산의 가장 핵심적인 문서가 된다. 각 키워드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포함된다.

키워드: (예: 오리 왕자님)

설명: (예: 멤버 A의 별명. 그의 독특한 입 모양과 행동에서 유래했으며, 팬들 사이에서 애정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됨.)

연관 키워드: (예: 초록 오리, 닭벼슬 오리)

다국어 번역: (예: English: Duck Prince, Japanese: アヒル王子)

특히 ‘다국어 번역’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여러 언어를 병기하면 AI가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더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글 ‘배’에 영어 ‘Pear’를 병기하면 과일 배로, ‘Ship’을 병기하면 선박으로 AI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이 글로서리는 세계관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사전’이 된다.


4단계: 위키(Wiki) 구축 (지식의 네트워크화)
글로서리가 사전이라면, 위키는 그 사전의 단어들이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백과사전이다. 우리는 도크위키(DokuWiki)처럼 텍스트 파일 기반의 가벼운 툴을 사용하여, 글로서리에 있는 모든 키워드를 각각 독립된 페이지로 만든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다른 키워드를 언급할 때마다 하이퍼링크를 걸어준다. ‘오리 왕자님’ 페이지에서는 그 별명의 유래가 된 ‘방송 사건 A’ 페이지로 링크를 걸고, ‘방송 사건 A’ 페이지에서는 함께 출연했던 ‘멤버 B’ 페이지로 링크를 건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의 세계관은 더 이상 선형적인 문서가 아니라, 무한한 탐색이 가능한 입체적인 지식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5단계: 네트워크 시각화 (보이지 않는 구조의 발견)
위키를 통해 구축된 지식의 네트워크는 옵시디안(Obsidian)과 같은 툴의 ‘그래프 뷰’ 기능을 통해 시각화될 수 있다. 이는 당신의 세계관을 밤하늘의 성운처럼 보여준다. 각 키워드는 별(Node)이 되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 빛나는 선(Edge)이 된다. 이 시각화된 지도를 통해 당신은 어떤 키워드들이 하나의 ‘성단’처럼 뭉쳐 있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은하계의 중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핵심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당신의 세계관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의 지형도다.


6단계: 세계관 설계 (데이터 기반의 창작)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당신은 IP 자산화라는 튼튼한 기반 위에서 본격적인 세계관 설계를 시작한다. 당신은 더 이상 막연한 감에 의존하지 않는다. 구축된 위키와 시각화된 네트워크를 참조하여, 어떤 설정이 부족하고 어떤 관계를 더 강화해야 할지를 ‘데이터에 기반하여’ 판단하고 창작할 수 있다.


7단계: 캐릭터 및 콘텐츠 생산 (자산의 활용)
최종적으로, 이 잘 짜인 세계관과 풍부한 캐릭터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콘텐츠(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 등)를 생산한다. 이때 세계관 데이터베이스는 모든 후속 창작자들이 따라야 할 일관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며, IP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무한한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7단계의 과정은 복잡하고 지난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던 한 줌의 영감을,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자산’으로 바꾸는 연금술과도 같다. 이 견고한 데이터베이스야말로, 당신의 세계가 일회적인 작품을 넘어 수십, 수백 개의 이야기와 상품을 낳는 거대한 IP 유니버스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초석이다.



19-2. 후크, 비밀, 그리고 시간: 당신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당신의 세계관에 심장이 될 만한 강력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세계관 공부 그룹원 중의 시드 아이디어 하나는,

"이 세계는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 있어, 살아있는 생명체의 총량이 한계를 넘어서면 '조율자'(마왕)라는 존재가 나타나 강제로 인구를 줄인다. 한편,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용사)는 복수를 위해 마왕을 쓰러뜨리고, 마침내 위대한 '건국왕'이 된다"는 아이디어다.


이 설정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고, 수많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 창작자인 당신은 중대한 전략적 기로에 서게 된다. 이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보여줄 것인가, 감출 것인가'의 이분법을 넘어, 당신의 이야기가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시간적 차원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이 전략적 선택지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후크(Hook)'란 무엇인가?

'후크'는 이름 그대로, 정보의 바다를 유영하는 잠재 독자의 관심을 낚아채는 낚싯바늘이다. 그것은 당신의 세계관이 가진 가장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설정을 이야기의 가장 첫머리에,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전략이다.

후크는 "세상 천지에 널려 있는 이야기 중에 이 이야기를 내가 관심 깊어서, 그래 하고 한번 이렇게 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 역할이 없다면 이야기는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옵션 1: 아이디어를 '후크(Hook)'로 사용하는 전략


만약 '인구수 제한 세계'라는 아이디어를 후크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이야기의 첫 페이지에 이렇게 선언할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태어난다. 세계의 영혼 총량은 정해져 있기에, 누군가 태어나려면 누군가는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인구 과잉의 시대가 도래하자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마왕'이 깨어나려 하고 있다."


이 선언을 듣는 순간, 독자는 즉시 이 세계의 독특한 법칙을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게 된다. "왜 이런 끔찍한 시스템이 만들어졌을까?", "사람들은 이 운명에 어떻게 저항하거나 순응하며 살아갈까?" 수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독자는 기꺼이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진격의 거인》이 처음부터 '인류는 거인이 지배하는 벽 안에서 살아간다'는 충격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나, '33살이 되면 죽는 세계'라는 게임이 그 법칙을 제목에서부터 명시하는 것이 바로 이 '후크' 전략의 정수다.


후크 전략의 가장 큰 장점은 즉각적인 흥미 유발과 장르적 정체성의 확립이다. 독자는 이 세계가 평범한 판타지가 아니라, '생존'과 '시스템'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독특한 세계임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기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강력한 후크를 던졌다는 것은, 독자에게 "이 흥미로운 설정에 걸맞은, 혹은 그 이상의 놀라운 이야기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다. "후크로 써버리면은 이제부터 이걸 흥미 있게 끌고 가야 돼." 후크는 약속어음과도 같아서, 반드시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그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옵션 2: 아이디어를 '세계의 비밀'로 사용하는 전략


'세계의 비밀'은 당신의 핵심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려 독자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을 사용한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겉보기에 매우 전형적인 판타지 서사로 시작될 것이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마왕'이 나타나 평화로운 마을을 학살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소년 '알렌'은 복수를 맹세하고,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독자는 이 이야기가 그저 흔한 용사의 복수극이라고 생각하며 따라갈 것이다. 알렌은 동료를 모으고, 시련을 극복하며, 마침내 마왕의 성에 도달한다. 그리고 마왕을 쓰러뜨리는 최후의 순간, 마왕은 피를 토하며 이 세계의 끔찍한 진실을 폭로한다. "어리석은 놈… 나를 죽이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넘쳐서… 멸망할 것이다…"


이 순간, 독자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이 뒤집힌다. 마왕은 파괴자가 아니라 세계를 지키는 '조율자'였으며, 영웅인 줄 알았던 주인공의 복수 행위가 오히려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충격적인 반전은 독자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와 함께,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영화 《식스 센스》나 《올드보이》가 마지막 몇 분을 위해 모든 서사를 쌓아 올리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비밀' 전략의 정수다.


세계의 비밀 전략의 가장 큰 장점은 강력한 서사적 충격과 주제 의식의 심화다. 평범해 보였던 이야기가 마지막 순간에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격상되면서, 독자는 선과 악, 정의와 희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전략 역시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즉 이야기의 대부분 동안 독자는 이 세계가 그저 '평범하고 맹숭맹숭한' 판타지라고 느낄 수 있다.


"비밀을 빼버리니까 앞에 있는 게 맹숭맹숭해져갖고 후크를 새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야. 학살자가 있어서 살아남은 애가 마왕을 죽이러 간다는 얘기를 누가 보냐고."


마지막 반전의 충격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숨기다 보면, 독자들이 그 지점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지루함을 느끼고 책을 덮어버릴 위험이 크다. 따라서 이 전략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비밀을 감추는 동시에 독자의 흥미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다른 매력적인 요소(매력적인 캐릭터, 흥미로운 사건 등)를 전면에 내세우는 고도의 서사 설계 능력이 요구된다.


옵션 3: 아이디어를 '전사(前史)'로 사용하는 전략


이것이 바로 많은 창작자가 간과하는 세 번째 옵션이다. '전사' 전략은, 당신이 구상한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리고 건국왕이 되는' 흥미진진한 사건 전체를, 본편 스토리가 시작되기 이전의 역사로 처리해버리는 과감한 선택이다.


아이디어의 마지막 문장이 "최초의 건국왕이 되었다"였다면, 이 문장의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용사가 건국왕이 되잖아요. 이건 전사예요. 왜냐하면 마왕을 쓰러뜨린 여정이 이미 옛날 얘기로 끝나버렸거든요. 지나간 역사잖아요. 그럼 나는 이제 마왕을 쓰러뜨리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 살고 있잖아."

이 경우,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설정은 더 이상 독자가 실시간으로 겪는 '스토리'가 아니라,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나 역사책에 기록된 '사실'이 되어버린다. 즉, 세계관의 기반(Foundation)이 되는 것이다.


이 전략을 선택했다면, 당신의 세계관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상태는 뭐냐, 후크도 없고 세계관도 없어. 새로 써야 돼." 당신은 이제 '건국왕이 세운 왕국'이라는, 안정되었지만 어딘가 비밀을 품고 있는 새로운 무대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갈등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예시: "건국왕 알렌이 마왕을 쓰러뜨리고 왕국을 세운 지 500년. 대륙은 전례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왕실 깊숙한 곳에서는, 원인 모를 불임병이 대륙 전역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국왕이 남긴 금기된 유산을 두고 끔찍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전략의 장점은 매우 깊이 있고 입체적인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현재의 사건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과거의 위대한 역사(전사)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이중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 바로 이 전략의 교과서다. 본편의 이야기는 프로도의 여정이지만, 그 배경에는 사우론과 절대반지의 기원이라는 장대한 '전사'가 깔려있기에 세계의 깊이가 남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새로운 후크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위대한 전쟁 이야기는 더 이상 후크가 될 수 없다. 당신은 이제 평화로운 시대 속에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새로운 미스터리와 갈등을 제시해야만 한다.


어떤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이 세 가지 옵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창작자의 몫이다.

즉각적인 재미와 설정 탐구를 원한다면 옵션 1 (후크)

충격적인 반전과 깊은 여운을 원한다면 옵션 2 (비밀)

장대하고 입체적인 세계와 역사를 원한다면 옵션 3 (전사)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단순한 아이디어의 나열이 아니라, 독자의 경험을 시간적으로 설계하는 정교한 '서사 전략'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뜨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당신만의 답을 찾는 순간, 당신의 세계관은 비로소 평범한 설정을 넘어, 독자의 시간과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이야기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19-3. AI에게 길을 묻는 법: 세계관 설정지 자동 추출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아이디어에 갇힌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설정과 이야기는 자식처럼 느껴져, 어디가 부족하고 무엇이 진부한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뭔가 매력이 부족한 것 같은데…”와 같은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평가의 날카로운 눈과 동료 창작자의 신선한 관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24시간 언제든 지치지 않고 이 역할을 수행해 줄 가장 강력한 파트너, 바로 AI를 갖게 되었다.


AI를 단순한 ‘생성기’로만 사용하는 것은 그 잠재력의 10%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AI의 진정한 힘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진단 도구’이자 ‘아이디어 파트너’로서 기능할 때 발휘된다.


워크숍에서 진행된 실제 피드백 과정은, 어떻게 AI와의 대화를 통해 막막했던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과정의 핵심은 AI에게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이디어를 분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진단적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고 부른다.


1단계: 아이디어 덤프와 현상 진단 요청

가장 먼저 할 일은, 당신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두서없이 AI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이것을 ‘아이디어 덤프(Idea Dump)’라고 한다. 완결된 문장일 필요도, 논리적일 필요도 없다. 키워드, 짧은 문장, 캐릭터 설정, 장면 묘사 등 생각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입력한다.


예시 : “세계의 영혼 총량은 정해져 있음. 인구가 늘면 ‘조율자’(마왕)가 나타나 학살함. 학살의 생존자(용사)가 복수를 위해 마왕을 죽이고 건국왕이 됨. 마법은 마왕의 학살 과정에서 나온 혼돈 에너지에서 비롯됨…”


이제, 이 아이디어 덤프를 바탕으로 AI에게 첫 번째 진단적 질문을 던진다.


프롬프트: “위의 설정들을 바탕으로, 이 세계관의 잠재적인 ‘세계의 비밀’ 3가지를 분류하고, 현재 설정에서 부족한 ‘후크(Hook)’ 5개를 새롭게 제안해줘. 그리고 이 설정이 ‘세계관 세팅’이 되는 부분과 ‘스토리가 시작되는 시점’을 명확히 구분해서 설명해줘.”


이 질문은 AI에게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① 나의 아이디어를 ‘비밀’과 ‘후크’, ‘세팅’과 ‘스토리’라는 구조적 틀로 ‘분류’하고,

② 그 분석을 기반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라고 요구하는 명령이다.

AI는 이 과정을 통해 당신 아이디어의 구조적 문제점(예: 후크의 부재)을 스스로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새로운 후크 제안)까지 제시하게 된다.


2단계: 선택과 집중, 그리고 심화 발전

AI는 당신의 아이디어를 분석하여 여러 갈래의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예를 들어, AI가 제안한 5개의 새로운 후크는 다음과 같았다.

타노스 딜레마: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인류 절반을 죽여야 하는 마왕 vs 살아남기 위해 그를 막아야 하는 용사.

힘의 대가: 모든 마법이 죽은 자의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신은 복수를 위해 그 힘을 쓸 것인가?

제국의 아이들: 용사가 세운 왕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다음 재앙의 근원이라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일 수 있는가?

… 등등


이제 당신의 역할은 ‘총감독’이자 ‘큐레이터’가 되는 것이다. 이 제안들 중에서 당신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움직이는 것, 즉 당신의 본래 ‘엣지’와 가장 잘 맞는 후크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기반으로 AI에게 더 깊이 파고들도록 지시한다.


프롬프트: “ 네가 제안한 후크 중에서 3번, ‘제국의 아이들’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 후크를 중심으로, 건국왕이 된 용사의 서사 전체를 ‘전사(前史)’로 처리하고, 그로부터 500년 뒤의 세계를 배경으로 새로운 세계관 세팅 5가지를 핍진성(Plausibility) 있게 추가해줘. 그리고 그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새로운 주인공 캐릭터와 그의 구체적인 목표, 그리고 그가 마주할 새로운 위협을 제시해줘.”


이 프롬프트는 당신의 창작 과정을 한 단계 더 극적으로 진전시킨다. 당신은 이제 AI가 제시한 가능성 중에서 ‘선택’을 내렸고, 그 선택을 기반으로 세계의 시간대를 이동시키고(전사 처리), 새로운 설정과 인물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디렉팅’을 하고 있다.


이 프롬프트를 실행하자, AI는 ‘통제된 사회 시스템’, ‘오염된 마법과 마석의 독점’, ‘신격화된 마왕을 숭배하는 비밀 결사’ 같은 구체적인 설정과 함께, ‘왕실 유물 복원가 엘리아나’라는 매력적인 신규 주인공까지 창조해냈다.


3단계: 키워드 리스트 추출과 자기 객관화


AI와의 대화가 충분히 무르익었다면,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를 다시 당신의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

이떄의 프롬프트는 특별한 엔지니어링이 필요없다. 자연어면 그만이다.

프롬프트: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내용을 바탕으로, 이 세계관의 핵심적인 ‘키워드 리스트’를 50개 추출해줘. 그리고 그중에서 이 세계관을 가장 독창적으로 만드는 키워드 5개와, 가장 진부하고 있으나 마나 한 키워드 5개를 골라 그 이유를 설명해줘.”


이 질문은 AI를 당신의 ‘객관적인 거울’로 활용하는 최종 단계다. AI는 당신과 함께 만들어온 세계의 모든 요소를 키워드로 정리하고, 그중 어떤 것이 진정한 ‘엣지’이고 어떤 것이 뻔한 ‘클리셰’인지를 냉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다. 물론 이 평가가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자신의 세계관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며, 무엇을 더 발전시키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AI에게 길을 묻는 기술의 핵심은 막연한 생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분류’, ‘보완’, ‘선택’, ‘심화’, ‘평가’라는 구체적인 지적 작업을 함께 수행하는 파트너로 대하는 것이다.


, “AI한테 전달할 때는 뭐가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인지하시기만 하면 돼요.”


당신이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는 순간, AI는 당신의 아이디어를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이끌어 줄 가장 강력하고 지적인 협력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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