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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세계관 속의 진정한 나를 식별하는 법

by 김동은WhtDrgon

서문: 설계의 끝, 한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지금까지 우리는 28장에 걸쳐 세계의 법칙을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들일 후-크를 설계했으며,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공동체를 만드는 기술까지 논했다. 우리는 거대한 세계의 건축가이자 사회의 설계자였다. 하지만 이 모든 정교하고 거대한 설계는 결국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한다. 바로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내면이다.


세계관에 깊이 몰입하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나 시간 보내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나'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팍팍한 현실에서는 채울 수 없었던 '감정적 영양소'를 공급하는 적극적인 자아 형성 과정이다. 당신이 세심하게 설계한 세계관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수많은 '자아(페르소나)'들이 서로 관계 맺고, 갈등하고, 성장하는 거대한 무대가 된다.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 감정의 결이 너무 섬세해서, 일상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느낀 것을 설명하고 대화하기 위해 무려 세계가 필요하고, 세계관을 만들고 공유하고 확장시키며 세계관을 공유하는 집단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우리는 이제 설계자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당신이 만든 세계의 첫 번째 주민이 된 한 사람의 내면으로 함께 들어가 보고자 한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고, 관계 맺으며, 성장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이토록 공들여 세계를 만들어온 진정한 목표와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건축가의 설계도를 내려놓고,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심리학자이자 공감자의 여정을 시작해보자.


Part 1: 내 안의 내각, 캐릭터 공동체


29-1. '진정한 나'는 없다, '나의 운영자'가 있을 뿐

"진짜 너답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우리는 종종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어딘가에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나’가 숨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아침에 가정에서 남편으로 눈을 뜨고, 출근길에 직장인으로 변하며, 퇴근 후 친구를 만나 또 다른 내가 나타나는 이 흐름 속에서, 과연 어떤 모습이 ‘진짜 나’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 칼 융이 제시한 페르소나(Persona), 즉 ‘사회적 가면’의 개념은 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 수많은 캐릭터의 집합체다. ‘가족 안의 자상한 나’, ‘직장 안의 유능한 나’, ‘팬으로서의 열정적인 나’는 각기 다른 규칙과 가치를 가진 고유한 ‘세계관’ 속에서 작동하는 독립적인 캐릭터들이다.


이 글에서 페르소나는 육체를 동반하는 정서를 지칭하고, 거의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캐릭터는 대표적으로 SNS 계정으로 대표되어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별도의 세계관 설정, 그에 기반한 평판과 명예가 있는 객체적 소비주체를 부르는데 사용한다.


회사에서 실수했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과,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무대에서 실수했을 때 느끼는 안타까움의 온도는 왜 이렇게 다를까? 부모님께 용돈 받을 때의 미안함과 최애 굿즈를 살 때의 행복한 죄책감은 또 왜 이리 다른 걸까? 같은 감정인데 전혀 다른 온도를 갖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각의 ‘나’가 속한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직장인 페르소나’는 성과와 책임의 세계관에, ‘팬 캐릭터’는 사랑과 응원의 세계관에 속해있다.


문제는 "덕질하는 시간에 자기계발이나 해"라는 목소리처럼, 한 세계관의 잣대로 다른 세계관을 멋대로 재단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시간 낭비'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와의 수다를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모든 세계관은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 각기 다른 필수적인 영양분을 공급한다.


따라서 ‘진정한 나’란 어딘가에 숨겨진 단 하나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국가를 운영하는 내각처럼, 각자의 전문 분야를 책임지는 이 모든 캐릭터들을 조율하고, 자원을 배분하며, 갈등을 중재하는 내면의 ‘운영자’에 가깝다. 우리의 과제는 수많은 ‘가짜 나’ 속에서 ‘진짜 나’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이 다채로운 캐릭터 공동체를 어떻게 건강하게 운영할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일관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것이다. 당신의 진짜 임무는, 내 안의 모든 세계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세계들이 서로 건강하게 대화하도록 돕는 현명한 운영자가 되는 것이다.


29-2. 결핍된 영양소와 페르소나의 임무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운영자’는 왜 새로운 캐릭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우리는 왜 새로운 세계관에 그토록 깊이 빠져드는 것일까? 그 답은 ‘결핍된 감정적 영양소’의 보충이라는, 매우 실용적이고 생존에 가까운 이유에 있다. 마치 우리 몸이 비타민 C가 부족하면 신 과일을 찾듯, 우리의 정신 역시 결핍된 특정 감정을 채우기 위해 그 감정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세계를 찾아 나선다.


우리 내면의 캐릭터 공동체는 균형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매일 성과와 효율을 강요받는 ‘직장인 페르소나’가 ‘성취감’과 ‘책임감’이라는 영양소를 주로 공급한다면, 그의 내면에서는 ‘순수한 열정’, ‘무조건적인 지지’, ‘이해타산 없는 관계’ 같은 다른 종류의 영양소에 대한 극심한 결핍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내면의 운영자는 이 심리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팬 캐릭터’나 ‘게이머 캐릭터’를 활성화하고, 아이돌이나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에 접속하여 부족한 영양소를 공급받도록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26장에서 우리가 설계했던 ‘12가지 아키타입(후크)’은 바로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감정적 영양소의 목록과 같다. 누군가 ‘미스터리/발견’의 서사에 강하게 끌린다면, 그의 삶에는 ‘호기심’과 ‘지적 탐구’라는 영양소가 부족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관계/소속’의 후크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면, 그는 ‘유대감’과 ‘소속감’이라는 영양소에 목말라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덕질’이나 게임에 몰두하는 행위는, 종종 ‘자기계발’의 반대편에 있는 시간 낭비나 현실 도피로 폄하되곤 한다. 하지만 한 세계관의 잣대로 다른 세계관을 멋대로 재단하는 오류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는, 내면의 운영자가 정신적 건강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내리는 필수적인 처방이자, 매우 적극적인 ‘심리적 자기 돌봄’ 행위로 재정의될 수 있다.


세계관 설계자로서 당신의 임무는, 사람들이 어떤 감정적 영양소에 결핍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하고, 그 결핍을 가장 효과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세계를 제공하는 것이다. 당신이 정교하게 설계한 후크와 세계관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즐길 거리를 넘어, 내면의 공동체를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중요한 영양제이자 처방전이 될 수 있다.


Part 2: 관계의 다층성 - 세계관과 상호작용하는 네 가지 자아


29-3. 세계관의 네 가지 층위: 대상의 입체적 설계

주민들이 당신의 세계관에 깊이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Part 1에서 다룬 다양한 캐릭터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랑하고 몰입할 대상(아이돌, 주인공, 브랜드 등)이 단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입체적인 층위를 가져야 한다. 성공적인 세계관의 핵심 대상은 최소 네 가지 층위로 설계되어야 하며, 주민들의 다양한 캐릭터가 활동할 수 있는 다채로운 ‘놀이터’를 제공하는 핵심 설계 원리다.


앞서 다른 원고에서 아이돌4레이어에서 사용한 세계관 구성 계층을 여기로 가져오자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적 층위다. 대상의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연약하며,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무대 뒤에서 감기에 걸려 힘들어하거나, 스케줄에 지쳐 피곤해하는 모습, 사소한 실수나 개인적인 취향 같은 것들이다. 이 층위는 팬들이 대상에게 깊은 공감과 보호 본능을 느끼게 하는 현실적인 기반이 된다. 만약 이 층위가 없다면 대상은 차가운 상품이나 인공적인 캐릭터로만 느껴져,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팬들은 이 층위를 통해 대상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관계를 시작한다.


둘째는 공식적 층위다. 무대 위의 완벽한 퍼포먼스나 잘 만들어진 제품처럼, 완성된 결과물로서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다. 수많은 연습과 노력의 결과물인 칼군무, 잘 짜인 스토리라인, 흠잡을 데 없는 디자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층위는 팬들에게 감탄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그 가치를 소비하고 평가하는 기준점이 된다. 이 층위의 완성도가 낮다면, 팬들은 실망하고 지지를 철회할 수 있으며, 인간적 매력만으로는 오랜 시간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셋째는 서사적 층위다. 뮤직비디오나 작품 속에서 연기하는 공식적인 ‘배역 캐릭터’를 의미한다. 이들은 작품에 대한 감상습관 때문에 선언되는순간 현실적으로 인식된다. 영화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을 맡았으면 아이언맨인 것이다. 아이언맨같은 장르적 캐릭터가 아닐지라도 이 배역들은 배역이 속한 장르의 특성을 메시지로 지니며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 순수한 첫사랑의 소년,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진 영웅 등, 잘 짜인 서사 속에서 부여된 역할이다. 이 층위는 팬들이 이야기의 의미를 분석하고 감상하며, 감정적으로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장치다. 팬들은 이 캐릭터의 여정을 따라가며 함께 울고 웃는다.


마지막은 신화적 층위다. 공식 설정의 빈틈을 팬들의 상상력이 채워 넣으며 무한히 확장되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공식적으로 보여준 적 없는 캐릭터의 과거, 작품이 끝난 이후의 삶, 혹은 전혀 다른 세계관 속으로 들어간 모습 등, 팬픽이나 팬아트 속에서 재탄생하는 무수한 버전의 캐릭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층위가 없다면 팬덤의 창의적인 에너지가 발현될 공간이 사라지고, 세계관은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다. 이 네 가지 층위가 조화롭게 설계될 때, 비로소 대상은 하나의 입체적인 인격체로 살아 숨 쉬며 팬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29-4. 주민의 네 가지 얼굴: 페르소나 역할군과 분쟁의 씨앗

설계자가 제공한 네 가지 층위에 맞춰, 주민 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 네 가지 다른 페르소나 역할군을 발현시키며 입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공동체의 활력과 다양성의 원천이 되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조차 이 네 가지 페르소나는 때로 충돌하며, 커뮤니티 내 분쟁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첫째, 보호자 페르소나는 대상의 ‘인간적 층위’에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 이들은 대상을 걱정하고, 보살피며,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키려는 강한 보호 본능을 가진다. 이들의 언어는 염려와 지지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쉬게 해줘라" 혹은 "악플러들로부터 우리 아티스트를 지켜야 한다"와 같은 목소리가 이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은 공동체의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비평가 페르소나는 ‘공식적 층위’에 집중한다. 이들은 무대의 완성도나 제품의 품질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대상이 전문가로서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날카로운 피드백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는 분석과 평가다. "이번 무대는 아쉬웠다" 또는 "실력이 늘었다"와 같은 평가는 이들의 역할이다. 이들은 공동체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셋째, 해석자 페르소나는 ‘서사적 층위’를 탐구한다. 이들은 작품에 숨겨진 상징과 의미를 분석하고, 캐릭터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깊이 있는 감상을 즐긴다. 이들의 언어는 상징과 은유다. "이번 콘셉트는 성장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분석이나, 작품의 세계관을 집대성하는 활동은 이들의 몫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지적 깊이를 더하고, 세계관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넷째, 창작자 페르소나는 ‘신화적 층위’에서 활동한다. 이들은 공식 설정의 빈틈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 2차 창작물을 만들며, 세계관을 능동적으로 확장시킨다. 이들의 언어는 창조와 변주다. 팬픽, 팬아트, 팬메이드 영상 등은 모두 이 페르소나의 산물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문화적 자산을 생산하고, 세계관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커뮤니티 내의 많은 분쟁은 바로 이 페르소나들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컨디션이 안 좋은데 립싱크를 했다"는 상황에 대해, 보호자 페르소나는 "아픈데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옹호하는 반면, 비평가 페르소나는 "프로답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충돌하는 것이다. 이때 해석자 페르소나는 "어쩌면 그것은 ‘상처 입은 영웅’이라는 이번 앨범 콘셉트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고, 창작자 페르소나는 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짧은 소설을 쓸 수도 있다.


커뮤니티 관리자와 설계자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양측 모두의 근본 동기가 ‘애정’으로 동일하며, 단지 반응하는 층위와 캐릭터가 다를 뿐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파괴적인 싸움이 아닌 건설적인 토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Part 3: 공동체 안의 나 - 건강한 자아를 위한 경계 설정


29-5. 목소리 큰 소수와 침묵하는 다수: 팬덤의 역학 이해하기

커뮤니티의 여론은 왜 종종 부정적이거나 극단적인 소수의 목소리에 의해 주도되는 것처럼 보일까?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가 아닌, "나오셨습니다"라는 어색한 존칭이 표준이 된 이유를 생각해보자. "문법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고객보다, "손님에게 반말하냐"고 항의하는 고객의 클레임이 훨씬 더 강력하고 즉각적인 대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동체 내에서는 침묵하는 다수의 긍정보다, 목소리 큰 소수의 부정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클레임의 무게’ 법칙이 작용한다.


대부분의 선량한 팬들은 조용하다. 좋으면 마음속으로 만족하고, 고마우면 조용히 지갑을 연다. 굳이 자신의 긍정적인 감정을 소리 내어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 침묵은, 팬덤 전체를 대변하는 척하는 ‘대변자’들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그들은 "진정한 팬이라면 참을 수 없다" 또는 "팬들 대부분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로 팬덤을 분열시키고,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진정한 팬이 아니다’라며 배척하고, 팬덤을 ‘사유화’하려는 위험한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내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캐릭터가 누군가의 주장에 단순히 ‘좋다/나쁘다’는 기호를 표시하는 것은, 주체적인 의견 표명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소비자적 습관 때문에 ‘구매/거절’처럼 이것을 자신의 결정이라 착각하지만, 실은 타인이 설정한 프레임 안에서의 수동적인 반응일 뿐이다. 내 캐릭터들이 누군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머릿수’나 ‘들러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조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소수의 부정적인 목소리가 힘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묵하는 다수의 작은 긍정, 즉 "나는 좋은데?",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해요" 같은 목소리 하나하나가 그들의 주장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당신의 작은 ‘좋아요’ 한마디가 침묵을 깨고, 다른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공동체의 건강한 균형을 회복시키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9-6. 역할의 선을 지키는 법: 내 안의 예산 관리

우리는 평생 동안, 쉬지 않고 어떤 ‘배역(캐릭터)’을 맡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즉 메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건강한 삶이란, 내 안의 운영자가 각 배역의 균형을 끊임없이 식별하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이 조율의 핵심은, 각 캐릭터에게 할당된 유한한 자원, 즉 돈과 시간, 그리고 감정 에너지의 예산을 관리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스스로를 외톨이나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할지라도, 관계와 소속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팬덤 활동이나 게임 같은 세계관에 깊이 몰입하는 것을 ‘중독’이라고 쉽게 비판하는 시선은, 종종 인간의 복합적인 욕구를 무시하는 결여된 효율 중심적 사고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특정 세계관의 캐릭터(팬, 신앙인 등)가 내 안의 다른 모든 캐릭터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월권’이며 스스로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과정의 시작이다. 가족도, 종교도, 직장도, 예술도 모두 중요하다. 나의 모든 캐릭터들은 각자의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에 집중해야 하며, 다른 캐릭터의 재산(돈), 시간, 감정, 존재감을 부당하게 빼앗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직장인 페르소나’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 ‘가족 페르소나’를 소홀히 하게 만들거나, ‘팬 캐릭터’가 너무 많은 돈을 사용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나’의 예산을 깎아 먹는 것은, 그 배역이 자신의 선을 넘은 것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결핍 때문에 생긴 캐릭터가 오히려 또 다른 결핍을 낳는 악순환이다. 예를 들어, 현실 관계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활성화된 ‘온라인 커뮤니티 캐릭터’가 현실의 잠을 모두 빼앗아 ‘건강을 관리하는 나’의 결핍을 야기하는 식이다. 결국 마이너스 소용돌이, 즉 하강 나선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제하기 힘든 상태로 이끌 수 있다.


따라서 내 안의 운영자는 때로는 관리자처럼 각 캐릭터의 예산을 냉정하게 점검해야 하고, 때로는 부모처럼 특정 캐릭터가 너무 지치거나 폭주하지 않도록 돌봐야 한다. 그 누구도 당신의 캐릭터 공동체를 대신 운영해 줄 수는 없다. 타인이 특정 캐릭터의 성장을 도울 수는 있어도, 하나의 가 다른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자원을 독점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내면의 균형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자기 관리의 기술이다.


29-7.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 캐릭터공존의 원칙

내 안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선을 지키며 공존해야 하듯, 건강한 공동체 역시 그 안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각자의 ‘사랑 방식’, 즉 캐릭터를 존중하는 문화 위에 세워져야 한다. ‘나와 타인’ 사이의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 캐릭터 공존의 원칙’이다.


우리는 수많은 세계관에 동시에 속해 있다.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한 커뮤니티의 질서를 다른 커뮤니티에 그대로 들이대는 것이다. 아이돌 팬덤에서 소비자처럼 권리만 주장하거나, 종교 집단에서 직장인처럼 성과를 따지거나, 직장에서 신도처럼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모두 각 세계관의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 야구 규칙을 들이대는 것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갈등과 혼란을 낳는다.


설계자는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접 세계관의 시스템을 모사하지만, 구성원 스스로가 그 차이를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군대 콘셉트의 게임 길드는 실제 군대가 아니며 공동체의 국방을 책임지지 않는다. 학교처럼 공부한다고 해서 그 지식이 항상 현실에서 유용한 것은 아니다. 게임의 포인트가 화폐와 비슷한 형태를 띤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의 돈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익숙한 시스템에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습관이 나를 끌고 가도록 맥없이 놔두어서는 안 된다.


개념과 정보로 구성된 디지털 캐릭터들은, 극단적으로 정보량이 무거운 육체 기반의 현실 페르소나들과 달리, 이러한 규칙성과 습관성에 정서적으로 매몰되기 매우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령 아이돌 팬덤 커뮤니티라면 “아이돌과 나 사이에 다른 팬이 서서 아이돌의 역할을 대행하거나 나의 역할을 대행하게 해서는 안된다. 즉 내가 무대 위의 아이돌과 너 사이에 서지 않을테니 너도 그래서는 안된다,” 라는 식의 원칙을 세울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타인의 사랑 방식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의 사랑 방식을 존중해달라는 선언이다. 나의 ‘비평가 캐릭터’가 상대의 ‘보호자 캐릭터’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그저 "저는 이번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런 점이 아쉬웠어요"라고, 나의 입장에서 나의 생각을 말하면 된다. 상대의 감정이나 자격을 평가하는 대신, 각자의 캐릭터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공유하는 것이다.


누군가 팬레터를 쓰는 것을 "소용없다"고 말리지 않고, 누군가 굿즈를 사는 것을 "돈 낭비"라고 비난하지 않으며, 누군가 응원하는 방식에 대해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훈계하지 않는 것. 이처럼 각자의 캐릭터와 그 표현 방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비로소 소모적인 내부 갈등을 넘어 함께 성장할 수 있다.


‘나’라는 가장 중요한 유니버스의 메타 유니버스적 영향력.


이 제목이 29장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대체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소년이 소년만화를 통해 용기를 배우고, 우리가 문학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책, 라디오, 소꿉장난, TV, 그리고 스마트폰의 유튜브와 게임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미디어의 형태를 바꾸며 끊임없이 자신을 조직화하고 필요한 대체 경험들을 흡수해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양한 서클에 가입하듯 내면의 캐릭터들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은 마음속에서 서로 소셜 네트워크를 이루며 정보와 태도를 교류한다. 최근의 숏폼 콘텐츠는, 모든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대체 경험의 양을 극단적으로 늘려놓을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방식이 옳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더 많은 캐릭터를 더 빠르게 만들고 교체하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현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공들여 설계한 세계관과 커뮤니티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잘 설계된 세계관은, 무질서한 정보의 파편이 아니라 하나의 맥락과 규칙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된 커뮤니티는 집단 지성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고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는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두 가지 중요한 책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첫째는 외적 영향에 대한 경계다. 현실의 인간과 달리, 세계관 속에서 특정 목적(결핍 보충)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의 캐릭터는 순수하고 강력한 만큼 외부의 영향에 취약하다. 이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특정 세력에 의해 사유화되거나, 우리가 28장에서 다룬 파괴적인 컬트의 형태로 변질될 위험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는 내면의 균형을 맞추는 책임이다. 팬덤이나 신앙, 특정 세계관의 캐릭터가 나머지 전부보다 더 우월하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월권이며 내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신호다. 가족, 직장, 예술 등 나의 모든 캐릭터들은 각자의 역할에 집중해야 하며, 다른 캐릭터의 재산, 시간, 감정, 존재감을 부당하게 빼앗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결핍 때문에 생긴 캐릭터가 오히려 또 다른 결핍을 낳는 악순환은, 우리를 스스로 구제하기 힘든 상태로 이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많은 세계관에 동시에 속한 ‘멀티 유니버스적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 안의 운영자로서, 각 캐릭터의 균형을 끊임없이 식별하고 조율할 책임이 있다. 때로는 부모처럼, 때로는 관리자처럼, 나는 나를 돌봐야 한다.

세계관 설계의 여정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그 종착지는 그 세계를 통해 성장하는 한 사람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창작자의 진정한 성공은, 주민들이 당신의 세계 안에서 얼마나 다채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든 캐릭터를 조화롭게 통합하여 더 현명하고 균형 잡힌 ‘운영자’로 성장했는가에 달려있다.


결국, 세계관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최종적으로 비추어보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애써 가꾸어온 우리 내면의 캐릭터 공동체, 즉 ‘나의 내각’이다.


김동은WhtDrgon@MEJEworks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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