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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가이드의 끝, 당신 세계의 시작

by 김동은WhtDrgon


제30장. 가이드의 끝, 당신 세계의 시작: 창조자의 윤리와 책임

서문: 지도를 덮고 나침반을 들 시간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황무지 같았던 백지 위에서 작은 '시드' 하나를 심는 법을 배웠고, 그 씨앗이 거대한 '법칙'과 '역사'를 가진 숲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그 숲을 거닐게 하고, '후크'라는 초대장을 보내 '이웃'들을 불러 모았으며, 그들이 정착하여 살아갈 '커뮤니티'라는 마을을 건설하는 법까지 논했습니다.


이제 30장에 이르러, 저는 당신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만드는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만든 세계가 작동하기 시작했을 때, 창조자인 당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와 '책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설계도가 완성되고 건물이 지어지면 건축가는 현장을 떠나지만, 세계관 창작자의 일은 세계가 완성된 순간 비로소 진짜 시작됩니다. 당신의 세계는 이제 단순한 공상 소설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는 안식처이고, 누군가에게는 꿈을 키우는 놀이터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현실을 버티게 하는 제2의 고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장에서는 창작자가 가져야 할 윤리적 태도와, 당신의 세계관이 현실 세계에 미칠 선한 영향력, 그리고 이제 막 첫걸음을 떼려는 당신을 위한 마지막 응원을 담았습니다.


30-1. 창조자의 역설: 신(God)에서 정원사(Gardener)로

세계관 구축 초기, 창작자는 전지전능한 신입니다. 물리 법칙을 바꾸고, 생명을 창조하며,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이 절대적인 통제권은 창작의 가장 큰 기쁨이자 권력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에 '주민(팬덤)'들이 들어오고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순간, 당신은 기꺼이 그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성공한 세계관의 가장 큰 역설은 "창작자의 손을 떠날수록 더 강력해진다"는 점입니다. 주민들이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2차 창작을 하고,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해석을 내놓으며, 때로는 당신의 설정에 반기를 들 때, 초보 창작자는 당황하거나 분노합니다. "내 세계를 망치지 마!"라고 외치며 통제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의 성장을 막고 질식시키는 길입니다.


이제 당신의 역할은 통제하는 '신'이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는 '정원사'가 되어야 합니다. 정원사는 나무가 자라는 방향을 강제로 꺾지 않습니다. 다만 햇볕이 잘 들도록 가지를 쳐주고, 땅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며, 해충(악성 유저나 파괴적 갈등)으로부터 정원을 보호할 뿐입니다.


팬들이 만들어내는 '카논(Canon)'을 존중하십시오. 그들이 당신의 세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당신의 세계가 당신의 예상을 뛰어넘어 엉뚱한 곳으로 뻗어 나갈 때, 그것을 '오류'가 아닌 '진화'로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의 세계관은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30-2. 세계관의 윤리적 토대: 왜 '처음'이 중요한가

세계관을 작업하다 보면, 때로는 이것이 커뮤니티의 근간이 되며 정치, 종교, 팬덤과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강렬하게 믿고, 소속감을 느끼며, 때로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모습이 컬트(Cult)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창작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제공하는 '무언가'를 위해 머뭅니다. 그들은 세계관이 채워주는 결핍, 그곳에서 느끼는 소속감, 그 안에서 발견한 의미 때문에 안주합니다.


이는 심지어 음모론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음모론 추종자들은 창시자의 권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음모론이 설명해주는 '세계의 질서', 자신들만 아는 '진실'이라는 특권의식, 그리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서사적 안정감 때문에 그곳에 머뭅니다. 그래서 음모론의 창시자가 "사실 다 거짓이었어요"라고 번복해도 추종자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시자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진짜 진리'의 수호자가 됩니다.


세계관은 창작자의 통제를 넘어 독립적인 생명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초기 설계 단계에서 '좋은 방향성과 건강한 의도'를 심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세계관의 DNA에 혐오, 배타성, 파괴적 경쟁, 폐쇄성을 심으면, 그것은 커뮤니티가 커질수록 증폭됩니다. 일부 극단적 팬들에 의해 세계가 왜곡되고, 독성이 퍼지며, 결국 당신 자신도 손쓸 수 없는 괴물이 됩니다. 그 시점에서 당신이 "이건 내 의도가 아니었어요"라고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세계는 당신의 손을 떠났고, 사람들은 세계 그 자체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개방성, 다양성, 건강한 연대, 현실과의 균형을 세계관의 핵심 가치로 심어두면, 커뮤니티는 스스로를 정화하고 교정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극단적인 해석이 나타나도 커뮤니티 내부에서 자정 작용이 일어나고, 새로운 주민들이 들어와도 그 건강한 문화가 전수됩니다.


당신이 세계의 '신'이 아니라 '정원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정원사는 씨앗을 심을 때 이미 어떤 나무가 자랄지 알고 있습니다. 독초를 심으면 정원 전체가 망가지고, 건강한 나무를 심으면 생태계 전체가 번성합니다. 나무가 자란 후에는 뿌리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세계관의 윤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세계는 당신이 떠나도 계속 자랍니다. 나쁜 의도로 시작한 세계는 당신을 집어삼키고 파멸합니다.


30-3. 건강한 몰입을 위한 설계: 도피처가 아닌 충전소

우리는 29장에서 내면의 여러 자아(캐릭터)가 균형을 이뤄야 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균형을 지켜주는 것은 결국 세계관 설계자의 윤리적 책임과 맞닿아 있습니다.


강력한 세계관은 현실보다 더 매혹적입니다. 그곳에는 명확한 보상이 있고, 나를 알아주는 동료가 있으며,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서사가 있습니다. 이 매혹은 자칫 현실을 부정하고 가상으로 도피하게 만드는 마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컬티(Culty)'한 폐쇄성은 바로 여기서 싹틉니다.


당신이 만들어야 할 세계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현실을 더 잘 살아가게 만드는 '충전소'여야 합니다.


도피처: 현실의 나를 잊게 만들고, 가상의 지위와 보상에만 집착하게 하여, 결국 현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충전소: 현실에서 결핍된 감정(용기, 위로, 소속감)을 채워주고,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 더 단단하게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당신의 세계관 속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독자가 현실의 시련을 마주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커뮤니티에서 경험한 따뜻한 연대는, 사용자가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도 더 너그러워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세계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마세요"라고 경고하는 대신, "이 세계에서 얻은 힘으로 당신의 현실을 더 멋지게 만드세요"라고 격려하는 시스템을 설계하십시오. 그것이 창작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기여입니다.


30-4. AI 시대, 인간 창작자의 마지막 요새


이 가이드의 집필 과정에서도 AI는 훌륭한 파트너였습니다. 앞으로 기술은 더 발전할 것이고, 누구나 명령어 몇 줄로 그럴듯한 세계관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창작자인 당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AI는 '데이터'를 조합하여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세계를 만듭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핍'과 '욕망'을 통해 '유일한' 세계를 만듭니다.


AI는 상처받아본 적이 없기에 치유의 간절함을 모릅니다. AI는 외로워본 적이 없기에 연대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당신이 겪은 고유한 상실, 당신만이 느낀 기이한 아름다움,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 사소한 분노와 사랑.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불완전함'이야말로 AI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당신 세계관의 영혼(Soul)입니다.


기술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구로 부리십시오. 하지만 그 도구가 그려낼 밑그림은 오직 당신의 심장에서 나와야 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은, AI 시대에 더욱 빛나는 진리가 될 것입니다.


30-5. 당신의 세계를 시작하라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당신의 손에는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집을 지을 도구들이 쥐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첫 문장을 쓰고, 첫 번째 설정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톨킨의 중간계도 한 문장의 낙서에서 시작했고, 마블의 유니버스도 수많은 수정과 폐기를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은 누구나 엉성하고, 유치하며, 부끄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부끄러움을 견디고 '시작하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계는 아무도 초대할 수 없지만, 서툴게라도 끄집어낸 세계에는 누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당신과 같은 농담에 웃으며, 당신과 같은 꿈을 꾸는 '이웃'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당신의 세계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깃발을 흔드십시오. 당신의 욕망을,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세계를 선언하십시오.


이 책은 여기서 끝이 나지만, 당신의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부디 당신의 세계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며, 무엇보다 당신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동은WhtDrgon@MEJ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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