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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Oct 17. 2020

스페인의 이방인

선입견과 불편함

2017년 2월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5년이라는 긴 여행을 위해 처음 여권을 만들었다. 당연히 외국도 처음이었다. 처음 밟는 외국 땅인데 가족도, 친구도 없다니. 이제부터 내 거주지는 한국이 아닌 스페인이 되는 것임에도 뭘 하러 가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긴장되지 않았다. 어쩌면 인천에서 경유지인 도하에 가기까지는 한국인이 많았고, 기내 곳곳에서 한국어가 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하-마드리드행 비행기에는 한국인이 비교적 적었다. 당연히 한국어 안내사항도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들이 한국인인 것은 어쩌면 운 좋은 일이었다.


그들도 한국인을 봐서 반가운지 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조금 달랐다. 그들이 하는 말은 벌써 스페인에 온 것처럼 반 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왠지 악취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내가 편견이 적은 ‘보통의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나에게 타인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지 못하고 편견 있는 사람이었다. 불편해하지 말자,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불편함을 표현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건 후 7kg짜리 내 캐리어와 노트북, 카메라가 든 백팩까지 먼저 나서서 짐칸에 올려주었다. 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들은 분명히 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열 시간 동안 입을 열지 않아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들은 앉자마자 기내 화면 작동법을 내게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딱 잘라 말하며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눈을 감았다. 그들이 나의 불편한 마음을 눈치챈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나와 달리 공평하게 친절했고, 나는 눈을 감고 있는 내내 불편했다.


기내식이 두 좌석 앞까지 다가오자 그들은 자고 있던 나를 깨워 식사를 챙겨줬다. 내가 리모컨을 잘 넣지 못하고 헤맬 땐 제대로 넣어줬고, 가방을 뒤적거리다 의자 옆으로 지갑이 빠졌을 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까지 지갑을 찾도록 도와줬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잠깐이나마 그들이 내 지갑을 가져간 것이 아닐까 의심했던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드리드에 도착해서도 내 짐을 다 내려준 채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비행기 착륙이 20분 가까이 지연됐다. 심지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으러 지하철을 타야 했다. 내 짐은 허리까지 오는 이민가방 한 개, 작은 캐리어 두 개와 백팩 하나였다. 모든 것을 카트에 실어도 제대로 끌기 버거웠다. 발렌시아로 가는 기차는 미리 예약해 뒀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내 기차는 2시 10분. 공항에서 모든 일을 끝냈을 땐 2시였다. 공항에서 아토차 기차역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택시를 타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아토차 역으로 가 새로운 표를 사기로 했다. 기차 환불은 당연히 받지 못했다. 택시 기사는 ‘친절히’ 내 짐을 트렁크에 올려주고 핸들을 돌렸다. 적어도 스페인 내에선 모든 택시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임에도 나는 이것이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이들의 호의는 생각하지 못하고.


기차역에서 백팩 한 개와 캐리어 세 개를 끌고 가는 동양인을 도와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보안 검색대를 지날 때에도, 겨우 탄 기차에서도 고난은 이어졌다. 내 옆자리에 아무도 타지 않길 바랐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어마 무시한 캐리어들을 짐칸에 옮겨야 했다. 낑낑대며 짐을 올리는 나 때문에 몇몇은 단번에 지나갈 수 없었다.


내 바로 뒷자리의 여자는 벌레 보는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주시했다. 내 옆자리의 남자는 내게 몇 번의 눈짓을 받은 후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난 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남자는 몇 번의 신음과 함께 내 캐리어를 올려줬다.


47kg. 거의 내 몸무게와 비슷한 짐을 끌고 다닌 탓에 나는 땀범벅이었다. 게다가 19시간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해 떡진 머리까지. 두 시간 동안 나는 내 옆자리의 남자를 걱정했다. 내게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아서.


다행히 발렌시아 호아킨 소로야 역에서 짐을 내릴 땐 옆자리 남자와 그의 일행 아주머니가 힘을 보탰다. 나는 “무차스 그라시아스(정말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며 드디어 발렌시아 땅을 밟았다.


발렌시아 역과 내가 살 숙소의 거리는 분명 도보 6분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47kg짜리 짐을 끌고 50분을 헤맨 것일까. 아직 스페인 유심칩을 구입하지 못했기에 지도를 볼 수 없었다. 요금 폭탄을 맞을 각오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 오라며 주소를 불러줬고 너는 혼자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걱정 어린 목소리가 아니라 짐을 들어줄 사람이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주소를 들이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중 발렌시아 경찰 한 명은 지도까지 그려주며 설명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지도에 맞게 가지 못했다. 거대한 짐들에 기대어 있는, 누가 봐도 길 잃은 내 모습이 불쌍했는지 어느 건물 앞에 서있던 남자가 어디를 가느냐 물었다. 그는 주소를 보고 한 블록을 끼고돌면 된다고 일렀다. 나는 그대로 갔지만, 여전히 우리 집은 없었다.


결국 택시를 잡았다.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앓는 소리를 내며 트렁크에 짐을 실어준 발렌시아 택시 기사는 내 주소를 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여긴 바로 한 블록만 꺾으면 돼”라는 택시 기사에게 난 “그라시아스(고마워)”밖에 할 수 없었다. ‘바로 앞이지만 짐이 어마어마하니 그냥 갈게’라고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분명 도착까지 2유로였는데, 바퀴가 멈춰 서기 직전 4유로가 되는 요금을 보며 나는 ‘그래도 여기 온 게 어디야’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5유로를 건넸다. 그가 거스름돈을 맞게 줬는지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다. 난 감격스럽게 초인종을 누르고 방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샤워한 후 거의 16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타지에서의 첫날은 기차에서 한 번, 침대에서 한 번 눈물을 흘렸고 실망과 기쁨, 안심과 설렘이 공존하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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