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에 처음 왔을 때 느낀 것은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움’이었다. 분주하지만 평화로운 겨울의 아침, 혹시 학원에 지각할까 걸음을 재촉했지만 한가로이 걷는 사람들 속에서 나의 발걸음만 빨랐다. 여유로운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때 처음으로 ‘스페인에 왔구나’를 실감했다.
그날도 그랬다. 발렌시아에 도착한 지 2주 정도 된 어느 2월. 원래 비가 많이 오는 도시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왔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빗길을 뚫고 학원까지 30분을 걸어갔다. 평소라면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었지만, 비가 와서인지 괜히 울적한 기분에 발걸음 역시 무거웠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섰다. 비는 여전히 쏟아졌고 출근하는 차들은 많았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초록불을 기다리던 그때, 어느 흰색 차 하나가 쌩-하고 지나가며 횡단보도 앞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물을 튀겼다. 아, 다 젖었다. 신발부터 양말, 바지까지 순식간에 젖어버린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몇 마디 욕을 던졌다. 고개를 들자 한 스페인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마찬가지로 바지와 신발이 다 젖은 상태였다. 그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별 것 아니란 제스처를 취했다. 비 오는 날 아침에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던 커플은 서로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깔깔거리기 바빴다. 불만 섞인 말을 내뱉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 그저 같은 추억을 만들었다는 점에 행복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다. 그냥 비가 온 날 옷이 좀 젖은 것뿐이다. 집에 가서 빨면 모두 없어지는 일인데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난 걸까? 같은 상황을 너무도 다르게 바라보는 나와 그들 사이에 괴리감을 느꼈다. 언어의 장벽이 아닌 생각의 장벽이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화가 났던 기분은 사뭇 가라앉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여기서 배울 것은 언어만이 아니란 것을. 여유를 배우겠다고. 그럼 이곳에서 생활이 훨씬 밝아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