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내 말속 깊은 뜻까지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는 스페인에서는 더욱 그랬다. 특히 스페인엔 ‘홈스테이’뿐 아니라 ‘피소 꼼빠르띠도(piso compartido)’라고 부르는 셰어 하우스 문화가 발달했는데, 그렇기에 같이 사는 이들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셰어 하우스는 다른 문화를 더 빨리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사람에게 지치게 만들었다.
47kg의 짐을 끌고 발렌시아에 도착한 첫날, 나를 맞이한 것은 집주인 마르따의 딸 까를로따였다. 내 또래인 그는 따뜻하게 날 맞이했다. 다음날 아침에 만난 마르따 역시 날 반겼다. 마르따는 내가 스페인어를 거의 못한다는 점을 알고 날 도와주려 무던히 노력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 까를로따에게 강제로 나를 데려가게 했고, 자신의 카페에서 편히 공부할 수 있도록 핫초코와 비스킷까지 건넸다. 골치 아픈 첫 비자 신청에도 도움을 줬다. 또 본인의 지인들을 만날 때, 외식을 하러 갈 때마다 나를 데려가며 여러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를 제공했다.
마르따의 집은 한 달 임시 숙소로 발렌시아에 도착해 새로운 집을 구할 예정이었지만, 그의 이런 친절함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르따에게 이 집에 계속 살아도 되겠냐고 묻자 그는 “네가 떠나지 않길 원하고 있었어”라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돈 문제가 걸리자 그의 행동은 한순간에 변했다. 마르따 집에는 일주일에 두 번 발렌띠나가 청소를 하러 왔다. 내가 마르따의 집에 머문 지 한 달 조금 넘었을 때, 발렌띠나는 마르따에게 월급을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내가 들어와서 청소할 공간이 더 생겼으니 그에 맞는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따는 이 얘기를 듣고 나에게 똑같이 월세를 올려 받겠다 통보했다. 갑자기 약 10만 원 가까이 되는 월세가 올라버리자 나는 더 이상 그 집에 살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마르따에게 집을 나가겠다 말하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보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차가운 표정이 드리웠다. 그는 월세를 올려 받지 않는 대신 내 방 청소는 알아서 할 것을 제안했다.
발렌띠나가 내 방을 청소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타지에 처음 온 나를 가족처럼 여겨준 사람이 돈 얘기가 나오는 순간 변하는 표정을 보자, 더 이상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 달이 끝나면 집을 나가기로 했다. 부족한 스페인어로 새 집을 구하는데 정신이 없어 보증금도 받지 못하고 나온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마르따는 내가 집을 떠나는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며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마르따의 집을 나와 총 8명의 인원이 함께 사는 셰어 하우스에 6개월 간 살았다. 집과 내 방은 충분히 넓었지만 나는 6개월 계약이 끝난 후 새로운 집을 구했다. 새로 구한 집은 총 5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곳으로, A나라 2명, B나라 2명의 하우스 메이트가 있었다. 위치, 가격, 조건까지 완벽했던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하우스 메이트와도 무난히 지내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중, B나라 친구들 두 명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A나라 하우스 메이트 한 명은 두 개의 공실에 본인 친구들을 데려왔다. 이제 이 집엔 A나라 4명과 내가 살게 됐다.
스페인 대학교 입학시험을 3개월 앞둔 어느 날, 어느 때처럼 내 방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스페인엔 독서실이 따로 없고 도서관도 9시면 문을 닫으니 집에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별안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30분 후 그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새벽 파티를 즐겼다.
어느 날은 하우스 메이트 한 명이 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주말부부이자 기러기 아빠였다. 그의 아들은 집안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말 뿐이었다. 거실에서는 매번 A나라 친구들의 파티가 이어졌다.
이런 일이 두 달 가까이 지속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밤에는 제발 조용히 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결국 내 시험이 끝나고, 하우스 메이트 몇몇이 이사를 가고 나서 집은 조용해졌다.
문화의 차이인지 생각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이 아닌 다르다는 것도 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고, 내가 그들 사회에 들어갔다면 어느 정도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름을 참고 감당하며 살기엔 내 그릇이 그리 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