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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Oct 20. 2020

페로제도

언어만이 대화의 도구는 아니다

페로제도.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 있는 덴마크령 섬나라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비슷한 시기에 자치권을 획득한 곳으로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고등학생 시절 지리를 좋아했지만 페로제도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2017년 이후, 페로제도는 나에게 조금 특별한 곳이 됐다.


나는 발렌시아 어학원에서 가장 기초반인 A1 수업 두 시간, 한 단계 높은 A2 수업 두 시간을 들었다. 기초반에서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이들은 두 명으로 벨기에 동갑내기 야르노와 페로제도 아저씨 에윤이었다. 우리는 모두 인사말밖에 못하는 수준이었기에 문장이 아닌 단어로 대화했다. 


야르노는 수업에 빠지는 날이 잦았다. 자연스레 에윤과 나, 둘이서만 수업을 듣는 날이 많아졌다. 에윤은 페로제도 1부 리그의 한 축구팀 감독이다. 이전에 축구기자인 적도 있었다. 나 역시 축구 특파원을 막 시작하던 때이기에 공통점을 발견한 우리는 더듬더듬 대화를 하며 조금씩 친해졌다. 


한 번은 기초 단어를 활용해 문장을 만드는 수업이 있었다. 스페인 어학원에선 대화가 주된 참여형 수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에윤과 나는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문법을 익혔다. 한국과 페로제도(선생인 파트리시아는 편의상 덴마크라고 칭했지만)에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나중에 살고 싶은 집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이었다. 에윤은 나에게 “한국에 기아 자동차 있어?”라고 묻더니, 나중에 자동차는 두 대를 가질 것이라 덧붙였다. 하나는 페라리, 하나는 기아로.


며칠 뒤 야르노가 수업에 와 완전체가 되자 우리는 한 가지 게임을 했다. 속으로 유명인을 한 명 생각하고 스무고개를 통해 어떤 인물인지 맞추는 게임이었다. 나는 누구나 알고 있을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생각했다. 첫 주자는 에윤이었다. 에윤은 “난 포르투갈인이야”라며 나에게 맞추라는 눈짓을 보냈다. 에윤도 호날두를 생각한 것이다. 이후 내 차례까지 끝나고 나 역시 호날두를 생각했음이 밝혀지자 파트리시아는 축구로 텔레파시가 통했다고 좋아했다. 이후에도 발표형 수업이 있을 때마다 에윤은 나에 대한 예문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별 다른 대화 없이 친해졌다.


A1 수업이 끝나고 A2 수업엔 전혀 다른 이들과 함께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문장을 만들어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줄 아는 수준이었다. 나는 항상 2교시가 되면 기가 죽었다. 더군다나 원래 있던 반에 내가 들어간 것이라 학생들의 이름, 국적을 알아내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에이’라고 불리는 에이버는 나와 동갑인 덴마크 출신이다. 그는 모든 질문에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막힘없이 대답하는 모범생이다. 차가운 인상에 잘 웃지 않았지만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그는 축구선수였다. 스페인 여자축구 2부 리그 팀 ‘미슬라타’에 소속된 선수로 주말마다 경기를 치렀다. 월요일은 항상 그의 경기 결과를 묻는 날이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학원을 나서자 에윤이 문 앞에 있었다. 1교시만 듣는 에윤이 학원 앞에 있자 의아했는데, 그는 이어 나오는 에이를 반겼다. 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니 에윤은 에이가 자신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에이는 덴마크가 아닌 페로제도 출신이었다. 이후 안 사실이지만, 에이는 페로제도를 ‘덴마크’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하지만 당시엔 에이 역시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했고, 페로제도에 대한 부연설명을 해도 ‘편의상’ 덴마크로 칭하는 이들이 많아 이에 대해 반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이름도, 생김새도 비슷했다.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무튼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에이와도 좀 더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은 발렌시아에서 가장 특별한 달이다. 최대 규모 축제인 라스 파야스(las fallas)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3월 내내 오후 2시엔 발렌시아 고유의 소리만 나는 불꽃놀이 마스끌레따(mascleta)가 터지고, 개성을 살린 화려하고 커다란 동상이 거리마다 줄을 잇는다. 주요 축제 기간인 5일 동안 발렌시아 자치주에 속한 ‘부뇰’의 전통 음식 ‘부뇨엘로스’를 비롯한 길거리 음식을 먹고 밤마다 눈이 즐거운 불꽃놀이가 이어진다. 축제 마지막 날, 1등을 제외한 모든 동상을 불에 태우는 것으로 발렌시아 인들의 최대 축제는 막을 내린다.


학원에서는 본격적인 축제가 있기 하루 전, 수업 대신 밖으로 나가 동상들을 구경했다. 이어 모여 앉아 초콜릿에 부뇨엘로스를 찍어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나는 에윤, 에이와 함께 앉아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에윤은 잠시 페로제도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자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벌써부터 1교시 수업이 심심할 것 같았다. 에윤은 내 부뇨엘로스를 대신 계산하며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을 전했다.


4월의 어느 날, 에이와 부쩍 가까워진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2교시를 함께 듣는 이탈리아 출신 아시아와 태국 출신 레. 우리는 각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와 에이 집에 모여 점심을 먹기로 했다. 


요리에 자신이 없었지만 나는 전날 밤 불고기 양념을 구해 고기를 재워 놨다. 하지만 간을 맞추는데 실패해 너무 짠 불고기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고기를 맛있게 먹어줬다. 에이는 미트볼과 샐러드를, 아시아는 까르보나라, 레는 팟타이를 준비했다. 모두 익숙한 음식이었지만 처음 보는 맛이었다. 아직도 그날 먹은 팟타이보다 맛있는 팟타이를 먹은 적이 없을 정도다.


점심을 먹고 에이는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였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바이올린을 켜왔다는 그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나 역시 초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에이를 보니 바이올린 연습을 소홀히 하고 꾸준히 배우지 않은 점이 후회됐다.


에윤은 축구팀 일이 바빠 다시 발렌시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는 페로제도에서 여름 방학을 보낸 후 9월, 다시 발렌시아 땅을 밟았다. 우리는 학원에서 같이 스페인 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주말엔 에이의 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관심사와 목표가 같던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스페인에선 축구선수로, 페로제도에선 잔디 관리사로 지내던 에이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어로 입학시험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에이는 별안간 학원을 그만뒀다. 페로제도에선 대학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에이 본인도 심리학 전공에 대한 꿈보다 축구선수, 잔디 관리사로 지내며 느끼는 행복이 더 크다고 깨달은 것이다. 갑작스럽고 짧은 작별 인사를 하고 에이는 페로제도로 돌아갔다.


에윤은 내 생일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SNS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본인이 맡은 팀이 이번 시즌 몇 위를 했는지 자랑하기도, 내가 학교에 다니며 축구기자 일을 계속하는 것을 격려하기도 했다. 


페로제도에 놀러 가기로 에이와 약속했었다. 에이는 자기 집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하나씩 보여주겠다고 했다. 본인 집에서 강 하나를 끼고 있는 친척집이 보인다고, 내가 믿지 못하자 페로제도에 오면 보여주겠노라 했다. 낮엔 푸른 목초지와 양 떼를,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보여주겠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씩 미루다 보니 2020년이 됐다. 결국 페로제도의 여행도 먼 훗날을 기약하게 됐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작은 꿈이 있다. 나에게 조금 특별한 곳, 사진으로만 보던 페로제도에 가서 그들을 재회하는 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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