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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Oct 25. 2020

북치는 마놀로

순수한 마음의 힘

정열, 낭만, 축구. 스페인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들을 떠올리곤 한다. 특히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소문난 이곳은 축구 여행의 성지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을 가기 위해 스페인을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축구에 대한 꿈을 안고 스페인 땅을 밟았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축구기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이들 중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수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축구에 미쳐 있다. 그들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없다. 대부분 어릴 때부터 지역 연고 팀의 축구를 보고 자란 이들은 축구와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2017년, 스페인에서 처음 인터뷰를 했던 마놀로도 그랬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축덕’이 발렌시아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바에 찾아갔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평일 오후, 그의 가게는 굳게 닫혀 있었다. 결국 발렌시아 경기가 있는 시간에 맞춰 다시 방문했다. 이번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가게가 나를 맞이했다. 앉을자리를 겨우 구한 나는 맥주 한 잔을 시켜 가게를 둘러봤다.


온통 축구로 가득 찬 그곳은 축구에 미쳐 있는 이들을 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구단의 머플러와 신문기사, 북, 사진이 온 벽과 천장을 채웠고 다섯 대의 텔레비전에선 축구 경기가 방송됐다. 


마놀로는 50년 넘게 모든 월드컵을 따라가 북을 치며 스페인을 응원했다. 우에스카, 사라고사, 발렌시아 등 그가 거친 도시는 모두 그의 팀이다. 하나의 연고에서 한 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자국이 남은 모든 도시의 축구를 응원하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축구와 함께 인생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열정을 높이 산 이들은 마놀로의 바에 방문해 함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며 인연을 만들었다.


경기를 보며 환호하는 스페인 손님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동양인을 보고 마놀로는 말을 걸었다. 내가 한국에서 온 기자이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 나를 불러 같이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시그니처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은 후에야 그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가 궁금한지 물었다.


이미 축구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찬 곳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며칠 뒤 인터뷰 약속을 잡고 중계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마놀로는 다른 손님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그 시간을 즐겼다.


수요일 오후, 다시 마놀로의 가게를 찾아가자 그는 나를 위해 특별히 문을 연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콜라 한 잔을 내주며 자리에 앉은 그는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지 다시 물었다. 축구와 함께 보낸 그의 인생을 묻자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자신이 왜 축구를 좋아하는지, 왜 모든 대회를 따라가 북을 치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냥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항상 그랬기에 북을 들고 경기장에 가는 것이 당연한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했다.


마놀로는 축구를 보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친구가 된다고 했다. 오늘부터는 한국인 친구 한 명이 생겼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읽어보라고 자신의 자서전을 선물로 줬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해 그것이 인생의 일부분이 되는 것.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과 열정을 잃지 않고, 잊지 않고 50년 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가늠되지 않았다. 나는 17살부터 축구로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때 내 꿈은 그 무엇보다 컸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었고 막연히 스페인이 좋았다. 결국 스페인에 와서 축구기자로 글을 쓰지만 맞닿은 현실을 볼 때마다 내 꿈은 작아졌다. 그렇기에 한결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그 힘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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