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오후 4시. 역사 시험 28번 답을 입력할 때쯤이었다. 10분 전부터 내 신경은 자꾸 노트북 오른쪽 하단에 있는 시계로 쏠렸다. 남은 두 문제를 서둘러 풀어버리고 나와 핸드폰을 꺼냈다. 4시 5분쯤 됐을까. 생일 축하 메시지가 하나 둘 쌓여 핸드폰 화면을 채웠다. 한국은 어느덧 12월 22일 오전 12시가 넘었다. 한국보다 8시간 느린 스페인 덕분에 나는 32시간 동안 생일일 수 있었다.
2020년 12월 22일. 처음이었다. 생일을 혼자 보낸 것도, 미역국을 먹지 않은 것도.
유난을 떨며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하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서부턴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곤 선물을 받아본 적도 거의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가족들과 미역국을 먹고, 케이크를 자르며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날'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스페인에 온 후론 다시 의미를 부여했다. 생일은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는 명분이 되는 날이자 연락이 뜸했던 이들의 반가운 메시지를 받을 기회가 되는 날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 연락이 오기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에게 연락 오지 않기도 한다. 평소 쑥스러워 전하지 못했던 말도 마치 이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용기와 함께 다가온다. 그저 이게 좋았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모두가 나의 행복을 빌어주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위한 이야기를 해주니까.
외로움이 무서운 나는 2020년 12월 22일이 다가오는 것도 무서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일 축하한다며 같이 미역국을 먹어줄 가족도, 케이크 초를 같이 불어줄 친구도 없을 거란 사실을 알았으니까.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더 이상 혼자 있기 싫었을 뿐인데. 이미 외로운 시간은 많았으니 하루라도 외롭지 않고 싶었다.
그럼에도 혼자 보낼 그 날이 와버렸고 피할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32시간이나 됐다. 올해 내 보상은 32시간 동안 외로움에 빠져 지내지 않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미역을 구하진 못했지만 케이크라도 먹어야지, 하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빵집에 갔다. 심사숙고 끝에 아몬드 가루와 캐러멜 시럽이 뿌려진 케이크와 버터쿠키 네 개를 골랐다. 사장님은 "'생일 축하해' 초 필요해?"라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사장님께 초가 필요하다고, 오늘 내 생일이라고 말했으면 생일 축하한다는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을까.
며칠 전 욕조 호스가 고장 났다. 집주인은 오늘 아침 손봐줄 사람이 올 것이라 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행히 집주인의 끈질긴 전화 끝에 오후 8시쯤, 기사 하나를 다 쓰자마자 수리공과 집주인이 도착했다. 호스가 고쳐지는 동안 집주인과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사실 오늘 내 생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생일은 별 거 아니니까. 그런데 집주인과 수리공이 떠나자 아까 집주인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직접 들었을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니까 나는 자꾸 외로움에 빠지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오늘 경기는 두 개가 있었고 내가 써야 할 기사도 두 개였다. 나는 기자니까 생일날 축구 경기를 보며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리오넬 메시는 오늘 경기에서 역대 단일 클럽 최다골 기록을 경신했다. 이런 대기록을 직접 보고 기사로 쓰다니. 그것도 내 생일에.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한국 시간으로 열두 시가 땡 하던 시간에, 스페인 시간으로 열두 시가 땡 하던 시간에 맞춰 메시지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연락에 무기력을 느끼던 요즘이지만 열두 시가 되기를 기다리던 그들의 마음에, 32시간 동안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준 그들에게 고마웠다.
가족끼리 예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5년 넘게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은 적 없는 동생이 있다. 수리공을 기다리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는데 그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그는 '더 보기'를 눌러야 보일 만큼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과감한 선택을 한 나를 보고 본인 역시 용기를 얻어 도전을 꿈꾼다는 말을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건넸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프로필에 걸어둔 스페인 하늘 사진을 보며 언젠가 한국을 떠나볼 것을 다짐한다고도 했다. 생일이라는 핑계로 건네는 따뜻한 말이 좋았다.
나는 생각보다 멋진 생일을 보냈다. 앞으로 혼자 보낼 이 날이 더 많을지, 사람들과 함께 보낼 이 날이 더 많을지 모르겠지만, 혼자 보낸 이 날도 외롭지 않고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