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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야 LEEya Oct 18. 2019

Be brave=Be you 인 이유 3가지

나 다운 용기 있는 삶을 산다는 것

가장 나 다운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종종 던지고는 한다. 너무 바빠서 정신없을 때야 그 상황을 따라서 살기도 바쁘다. 하지만, 그 바쁜 시간이 가라앉을 즘, 혼자의 시간을 가질 때, 묻게 되는 질문. 나 다운 게 뭘까?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하는 질문이지 싶다. 이 질문 때문에 사춘기가 있는 것인지, 사춘기라 이 질문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춘기 때 부터 이 질문은 더 심해진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질문 때문에 가끔 방황이란 것도 한다. 나 다운 것과 외부의 요구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나 다운 것이 무엇인지 발견 조차 못한 것 같아서 스스로 안타까워할 때도 있다. 


이 모든 복잡함을 다 뒤로 하고 가만히 보면, 나 다움은 용감함 이다. 누가 뭐라든 내가 나 일 수 있기 위해서는 겁없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있어야, 나 다움이 용감함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그 때 부터 나 다울 수가 있다. 시작도 그렇고, 계속 그렇다. 


용감함은 나 다움이다. 왜 용감함과 나 다움이 마주 닿아 있을까? 


첫째, 나 다운 나를 찾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 다운 나를 찾기 위해서는 일단 나와 정직히 마주해야 한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는 나 다울 수가 없다. 그런데 나를 마주 한다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정말 나를 마주 하는 순간에는 괜찮은 나, 부끄러운 나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아주 멋있는 사람이길 은연중에 기대한다. 그 기대감은 좋은 것 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 이 기대감이 나를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게도 한다. 이 기대감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압박, 이 기대감에 스스로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오는 은근히 작아진 마음... 실은 이 모든 것은 나를 마주 하지 않는데서 온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마주 한다는 의미가 뭘까? 내가 나를 마주한다는 의미는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듯 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아 이런 좋은 모습을 내가 가졌어. 이것이 나의 장점이구나. 아 나는 이런 내 모습이 좋은데?'하고 인정해주면 된다. 은근히 나의 좋은 모습, 매력적인 모습을 알리고 싶다가도 남이 칭찬해 줄라치면 '어머, 아니어요." 하며 나를 구석에 놓지 말자. 좋은 나의 그 모습도 '나'이니, 그대로를 좋아해 주는 것, 그것이 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나의 어글리 한 모습을 보았다면? 겉으로 쿨한 모습으로 살아가려 발버둥 치지만, 집에 오면 손끝 먼지까지 기억할 정도로 뒤가 긴 것이 나라면? 늘 당당함을 추구하는 나의 모습의 뒷면에는 소심함으로 콩닥거리는 것이 나라면? 뭐 그런 거지, 하고 받아주면 그만이다. 그런 나를 굳이 평가 절하할 필요도 없고, 탓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렇구나 하고 다독다독 받아주면 된다. 그것이 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못난 나의 모습을 내가 마주했을 때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못난 그 모습도 내가 안아주어야 할 모습이다. 오히려 용기 있게 한 발 더 다가서면 어떨까? 


그렇게, 그대로 나를 봐주는 것이 때로 왜 안 민망하겠는가? 나 스스로 내가 매력적이라고, 아름답다고 지금 인정해 보라. 당장 들뜬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손발이 오그라 들 수도 있다. 나 스스로 내가 실은 소심하고, 상처도 잘 받는 다고  인정해 보라. 내가 별로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여기서 기억할 것! 내가 나를 마주 할 때는 평가하기 위함은 아니다. 나는 나를 그대로 마주하고 낯선 나와 친구가 되어 가기 위함이다. 나를 그대로 살기 위함이다. 이 과정에는 '나'라는 사람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나 다움은 용기를 기반으로 한다. 아니 나 다움은 용기 자체이다. 


둘째, 나답다는 것은 나로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 또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으로 막연히 많은 것들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시간표로 살아야 하고, 어떤 범주의 선택을 해야 하고 가 많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 수많은 기준들은 이미 '되고' '안되고'를 결정 지어 놓는 듯하다. '넌 이래서 되고' '넌 이래서 안되고' 그런데 이 외부의 기준들 말고, 그냥 나의 기준으로 용기 있게 살면 어떨까? 


실은, 남들 사는 대로 살지 않는다고 눈치를 주는 것이 우리 사회다. 하지만, 한편 외부가 정해 준 대로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 각자의 기준으로 산 사람들을 우리는 '용감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미스티 코플랜드. 외부의 기준으로 치면,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백인들의 무대인 곳에서 흑인이라 안되고, 어린 시절 가난해서 돈 드는 발레는 안되고, 키가 작아서 안되고, 안 될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그녀.  


발레만큼 기준이 까다로운 분야가 있을까? 외부의 잣대가 명확한 곳.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아메리칸 수석 무영수가 되었다. 첫 여성 흑인 수석 무용수였다. 어쩌면, 처음 그녀가 깬 것은 외부에서 그녀에게 강요한 잣대였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흑인이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잣대를 깨고, 그녀 답게 그녀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낸 것이다. 그리고 나니까 외부의 잣대와 틀과 상관없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선택들은 참 용감했다. 용감하다.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외부의 충고는 때로 참 귀하다. 하지만, 외부에서 들이대는 잣대나 기준이 나를 나답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라면? 나를 헤치거나, 남을 헤치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기준으로 나 답게 살아보면 어떨까? 나 다운 결정을 하고, 나 다운 선택을 용기 있게 해 볼 만하다. 나 다운 결정, 그 용기 때문에 내가 더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도 있다. 


셋째, 나 다움은 용감함이다. 나에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나를 알아가는 것도 용기이고, 남들과 다른 선택들을 하는 것도 용기이다. 그리고, 나 다움이 져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기이다.


차라리, 좀 모르면 탓이라도 하지, 하는 생각들 해 본 적이 있는가? 차라리, '내가 나 답게 결정한 것이라고 안 했으면, 대충 묻혀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 해 본 적이 있는가? 가끔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들을 선택할 때마다 그 선택에 따른 책임,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마주하게 된다. 


잠시 일러스트에 빠져 2년간 그림을 그리고 지내던 시절이 있다. 저녁에는 영어강의를 하고, 밤 12시가 되면 그림을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밤새 그림을 그리고 늦은 오전 일러스트 학원을 갔다. 도시락을 싸 들고 하루 종일 그곳에 있다가, 다시 저녁이면 영어강의를 갔다. 그 2년간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참 좋았다. 너무 나 다웠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들이 고스란히 남아 나의 시간은 일 아니면 그림이었다. 잠도 거의 제대로 못 잔 2년간의 시간이 고생스럽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일 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다시는 못 할 짓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 또다시 비슷한 결정들을 해 가는 나. 일과 공부 병행을 다시는 못한다 했던 것이 언제인지, 결국 Tesol대학원을 다니게 된 것이다. 그때도 한참 영어강의를 할 때였다. 아, 나는 다시 용기를 내야 했다. 나 다움을 선택하는 것에 지불되는 용기였다. 뭐든 내 마음에 배워야 할 것이 있으면 배움을 선택하는 것이 나였다. 그리고 그 선택에 내 시간, 경제, 노력, 체력이 책임지기의 일환으로 지불되는 거다. 지금까지 이런 비슷한 결정들을 몇번씩 해 오는 것을 보면, 그것이 '나'구나 싶다. 나 다움을 사랑할 수록, 따라오는 책임이다. 원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 원리가 나 다운 선택에도 따라오는 거다. 


나를 마주하는 것, 나로서 사는 것, 나로서의 삶을 책임있게 사는 것, 나다움은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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