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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야 LEEya Nov 11. 2019

사랑과 통제의 차이 3가지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산다. 그게 누구를 향해 있던 그렇다. 친구던, 자식이던, 부모든, 나 자신이던, 연인이던, 일이던, 취미던, 무엇이든 간에 누 군든 사랑을 하고 산다. 인식을 하던 못하던 그렇다. 


문제는 이 사랑의 대상이 사람일 때이다. 사랑을 하는 것은 그저 주는 건가? 관심을 쏟아주고, 시간과 정성을 쏟아주면, 사랑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치면, 통제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통제라는 것이 외적으로 볼 때 반드시 강압적인 방법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엄청 사주거나, 선물을 주거나 , 시간과 정성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내 말을 듣게 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 두 가지가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럼 당연하지! 사랑해 줬으면 뭔가 돌아와야지.'라고 생각하는가?  반드시 대가를 원해서 상대를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고 나서는 은근히 대가를 바라고 있는 나를 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를 통제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신이 아닌 이상 이런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사랑과 통제, 대체,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뭘까?


사랑은 돌아올 것에 대한 정답을 미리 만들어 두지 않는다. 


사랑의 모양이, 대상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것 인정! 득도를 한 것이 아니고서야 사랑에 기대가 없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남녀 간의 사랑에선 쟁취를 한다라는 표현을 쓴다. 곧 내가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가 나에게 와야 한다는 기대를 말한다. 부모 자식 관계에선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부어 주는 만큼 자식이 잘 자라 줬으면 하고 소망을 한다. 부모의 사랑으로 자식이 공부를 잘하던, 건강하던, 부모님 말을 잘 들어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소망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소망, 내가 사랑한 상대와 좋은 관계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소망. 그 모든 기대와 소망을 통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애매하게 바람이라는 선을 넘어,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정하는 순간, 자칫 사랑에서 통제로 넘어가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정성을 주었으니, 내 손에 뭔가가 와야 한다는 정답지. 이미 내가 만든 예상 답지가 있고, 그대로 되어야 한다고 혼자 결정 해 버리는 것. 상대가 내가 생각한 그 그림대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는 결정 후에 정말 그렇게 되도록 몰아가는 것. 그 그림에 맞추어 가도록 정성을 붓는 것 그게 통제다. 


정답지. 그게 문제다.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성적이 이게 뭐야?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으니, 내 이야길 당연히 잘 들어줘야지.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으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알아야지.' 이런 마음은 이미 사랑 비슷해 보이는 통제이다. 신적인 존재가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통제는 내 방식대로 상대가 움직여야 사랑이라고 은연중에 결정지어 놓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아껴준다면, 그걸 사랑이라 말하진 못하겠다.


사랑은 상대가 나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 사랑의 상대도 사람인데, 설마 나와 늘 같은 결정들을 하길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사랑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따라  결정하고 '예스' 뿐 아니라 '노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의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가끔 어른들이 어린아이들 예쁘다고 묻지도 않고 다가가 끌어안는 것이 싫다. 요즘에는 조심스러워하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생각 없이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야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인데, 더 가면 사랑해서 인데, 아이 입장에서는 이것이 너무 싫을 수가 있다. 아이가 싫은데 그렇게 했다면 너무도 무례한 일이 돼버린다. 아이의 마음을 존중하지 않은 일방적인 태도에서 나온 무례함이다. 이처럼 작은 관심의 표현도 상대의 결정이 없이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도 비슷하다. 


와 닿게 비유를 하나 하자면 이렇다. 상대는 사랑이라 생각하고 밥상을 차린다. 그리고 나는 그날 도저히 밥 생각이 없어 먹지를 않는다. 그러면, 상대는 정성으로 사랑의 표현으로 차린 밥을 먹지 않은 나의 결정에 마음이 상한다. 내가 못 먹겠다고 결정하고 말하는 순간 상대의 사랑을 무시한 격이 된다고 생각하나? 상대는 분명, 시작은 분명, 사랑해서 식사를 차린 것이다. 그런데 내가 편이 결정을 할 수가 없다면? 우린 뭘 하고 있는 걸까? 사랑해서 식사를 차린 것은 상대의 결정. 못 먹겠어서 안 먹는 건 나의 결정. 


그렇게 상대의 결정이 다를  수, 예상 밖일 수 있다. 마음은 받을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결정을 상대가 할 수가 있다. 여전히 상대가 다른 결정들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 각자의 결정이 존중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인정되지 않는 사랑이라... 통제인지 사랑인지 모르겠다. 통제는 내 결정과 상대의 결정이 똑같아야 사랑이라고 믿는 억지 같은 마음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과 통제의 또 다른 큰 차이는, 후회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충분한 거고, 후회할 게 없다. 반면, 통제는 내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았으니 후회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도 하다. 후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시간 낭비다. 이 주제가 아닌, 어느 순간 떠올려도 탐탁지 않은 단어다. 꼭 지나 온 시간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퇴색시키는 단어 같아서 영 못마땅한 단어.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느 선생님에게 물어도 이것은 같은 답을 할 것이다.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은 안 듣는 데로, 모범생인 아이들은 그런대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일의 특징이 그런 거 같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사랑한다고 앞에서 말한 정답 같은 상황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아이들이 내가 사랑하며 가르쳤기 때문에 실력이 무조건 는다거나, 내가 그렇게 수업을 해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거나 그런 일 말이다. 실은 오히려 그렇게 정성을 쏟아도 학생이 언제 나를 보았냐는 듯이 제대로 인사도 없이 헤어질 때도 있다. 결과가 별로 인 경우가 있기도 하다.  


어느 경우던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랑하며 가르쳤던 그 순간 그 대가를 나는 다 받은 셈이다. 수업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시간 동안 학생들을 사랑했다는 것 때문에 행복했다는 거고, 내 시간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속 상한 일이 있었든 기쁜 일이 있었든 상관은 없다. 한 사람이 성장하는 걸 보는 감격스러운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함 이상이다. 


통제가 받아 낼 것을 은근히 강요한다면, 사랑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기분 좋은 에너지이다. 통제는 그 자체로 피곤한 일이고, 사랑은 그 자체로 보상이 주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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