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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야 LEEya Oct 24. 2021

비상의 시간, 마흔

진짜가 되어 날아오르다

‘날아올랐다. 바닥을 발로 밀어내며 하늘로 높이 점프를 하는 발레리노의 모습. 음악에 맞춰 점프하는 모습이 한 마리 새 같았다.’

날다 (2021. 10)

취미로 발레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발레리노를 꿈꾸는 한 학생의 시범을 본 적이 있다. 몇 가지 동작을 하더니 가볍게 점프를 하였다. 바닥을 발로 밀고 높이 뛰는 듯하더니 순간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아주 잠시 모든 게 멈추었고, 그 학생은 공중에서 날아오른 채 잠시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육의 힘이 좋아서겠지’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 “바닥을 잘 이용해야 해. 바닥을 밀어내는 힘!”이라고 발레 선생님이 학생을 향해 말씀하신다. 아, 높이 아름답게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바닥을 잘 느끼고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니. 바닥을 잘 이용하면 높이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 우리네 인생을 향한 말 같아서 자꾸만 곱씹어 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가지 선물을 마음에 담아왔다. 한편에는 어린 학생이 보여준 꿈같은 비상의 장면과 또 다른 한 편에는 삶의 원리를.


마흔은 그야말로 바닥을 차고 날아오르는 시기이다. 인생의 바닥이라고 하니 왠지 실패의 경험만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나 그렇지 않다. 바닥은 땅이다. 내 경험이 축적된 현실이며 아직 닿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다. 바닥은 크고 작은 성취와 실패를 기쁨과 아픔을 고스란히 지나온 곳이다. 동시에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하다. 바닥은 피할래야 피해지지 않는 곳이다. 바닥은 발이 닿아있는 곳, 지구와 우리 사이의 접촉점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경험한 바닥은 이십 대의 꿈이다. 막연한 절망도 막연한 꿈도 크기만 했던 그때. 예술가로의 성공을 꿈꾸었다. 10년은 버텨야 화가로 등단을 할 수 있다는 선배들의 말보다 더 빨리 등단도 하고 싶었다. 졸업 후 틈틈이 그림도 그리고 일도 했다. 스스로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영어강사로도 일하기 시작했고, 기대하지 않게 처음부터 이 일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문득 내가 예술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일종의 패배감이 들었다. 물론 일을 하는 기쁨은 있었다. 제법 아이들과 잘 지내고 가르치는 일에 보람도 큰 까닭에 성과도 좋았다. 영어강사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나는 결국 내 꿈을 지키지 못한 낙오자가 되어있었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붙들어야 할지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삼십 대가 지나고 마흔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나의 발에 닿은 땅, 나의 바닥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예술가로 살아남기로 더 독하게 결정하고 뛰어들지 않았다는 자괴감도 내 모습의 하나임을 인정했다. 틈틈이 그림을 그리느라 수고한 나 자신도 인정했고. 나름의 최선이었음도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은 내가 나의 학생들을 너무도 사랑했다는 점과 영어강사로의 일 또한 더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원한다면 예술가로의 삶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용기도 생겼다. 나의 실제를 인정하고 나니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나 실망이 거두어진다. 마음이 가벼워지자 갑자기 하고 싶은 일들도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졌다.


마흔의 전에 수많은 아쉬운 순간들. 결정하려다가 말아버린 많은 순간들, 그리고 도전과 성취의 순간들. 여전히 남아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난 이야기들. 멍하게 회피하려 했던 아프지만 소중한 기억들. 설레는 아름다운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갈  없고, 도망갈 생각도 이제는 없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모든 경험이 고스란히  발아래 나의 ‘바닥으로 나를 받쳐주고 있다. 마흔,  좋은 시간이다.


넷플릭스에 방영하고 있는 <더 볼드 타입; The Bold Type>에서 편집장인 재클린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결국 진실은 우리를 항상 더 강하게 하니까.”라는 말처럼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삶을 강하게 한다. 역시 그렇다. 바닥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고도 매력적인 일이다. 그야말로 ‘진짜’, ‘바닥’을 마주하면, 더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날아오르기에 아주 유리해져 버린다. 새도 자신의 다리로 바닥 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비행기도 활주로라는 긴 지상의 바닥을 치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우리도 각자의 바닥을 차고 마흔을 통해 날아오른다. 실패의 경험이 실망의 경험이 우리를 날게 한다. 시간 속에 축척된 작고 큰 성공의 경험이 우리를 날게 한다. 그럼 뭐. 마흔의 시간 이제는 바닥을 잘 이용해 날아오르는 것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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