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끝까지 간다 프로젝트
결정적 변화의 촉매는 때론(자주)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폭력적인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거대한 힘이 사막의 바람을 타고 이스라엘로 불어왔다. 세 번의 말발굽 소리가 있었고,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젊은 왕 여호야긴은 백성 8천 명과 함께 자기 땅에서 추방당했다. 끌려간 자도, 남은 자도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텅 빈 광장, 무너진 담, 부서진 문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번영을 이루던 혼잡한 도시는 자칼이 사는 곳이 되었다. 폐허가 된 도시, 그곳의 무시무시한 적막과 공허.
폐허가 되었기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에, 거기서 어떤 사람들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다(Armstrong, 2006/2010, p. 289). 이를 성경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신은 자신이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스스로 심은 것을 뽑기(예레미야서, 45장 4절)”도 했다. 지금의 질서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그것을 때론 거친 방식으로 변혁시키곤 한 것이다. 당시 신의 언어를 전하는 대표적인 선지자는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행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야훼는 도시를 파괴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이름은 과장된 비관주의의 대명사가 되곤했지만 그의 언어는 날카로웠고 옳았다.
그 날카로움과 옮음이 그를 외톨이로 만들기도 했지만, 외톨이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것은 모두가 “예스”를 말할 때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 고통스럽고 겁이 나고 불편해도, 진실로부터 등을 돌린 채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면 오늘보다 괜찮은 내일이란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듯싶었다.
예레미야는 종일 파멸과 멸망이라 외치고 다녔다. 신을 등지고 살아온 삶의 결과가 재앙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전쟁과 기근과 염병에 시달렸다. 신은 바빌로니아 군대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불사르도록 하겠다고 이야기했고,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성은 점령되었고, 집들은 불타오르고, 절망의 어둠은 짙어졌다.
엄혹한 시절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난을 부정하는 대신 사람들 앞에 슬픔의 인간으로 나타났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구석구석을 침범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597년, 그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이 시련의 시기를 견디면 더 내적인 영성을 얻게 될 터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 믿었고, 희망의 작은 불씨를 처절한 현실 앞에서 선언하곤 했다(Armstrong, 2006/2010, p. 291).
희망의 작은 불씨는 말 그대로 작은 불씨였다. 누군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그 작은 희망을 보지 못했다. 그럴 여지가 없었다. 때론 신을 원망했고, 때론 현실에 완전히 패배하기도 했다. 이 시절의 삶이 어땠을까를 떠올리다보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인물이 욥이다. 개인적으로 구약성서 중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게 욥기이기도 한데, 성경에서 욥의 몰락은 누가 보더라도 안쓰럽고 그만큼 드라마틱하다. 그는 경건하고 온화하고 신중하며 사랑받고 사랑주는 사람이었다. 신은 그를 사랑했다. 이게 욥기 드라마의 프롤로그라면 이야기는 사탄과 신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까?”(욥기 1장 9절)
이 질문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했고, 그렇게 욥을 사탄에게 맡겨본 거다. 사탄은 먼저 욥의 재산과 종들을 내쳤다. 곧이어 자식들도 죽여버리고, 욥의 온 몸은 악성 종양으로 망신창이가 된다.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의 파도가 욥을 삼킨다.
그가 겪었을 참담한 시련은 자기 혐오감과 뒤섞여 고통이 배가된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친밀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등을 돌린 현실이었다. 그는 뼈를 깎는 아픔과 뼈가 쑤시는 아픔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상은 그를 조롱하고 상황이 바뀌니 인심도 변했다. 자기가 돌보아 주었던 이들조차 그를 외면하다.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쳤구나. 빛을 바랐더니 어둠이 밀어닥쳤다”(욥기 30장 25-26).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누군가는 그의 자부심, 이만하면 내가 잘 산 것 아니냐는 자부심이 문제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돕는 자, 주는 자로서의 과도한 자부심이 문제였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 우월적 시선과 태도가 누군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눈물 흘리고 무력감을 느끼는 시대, 나는, 우리는 어디에 서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우정의 연대를 맺어야 하는가? 욥의 시련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김기석, 2020, 8, 2).
나는 그런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그러기엔 욥의 시련과 욥의 한탄에 절절하게 공감했다), 어쩌면 어려운 시절일수록 예민하고 세심한 관계의 노력, 연대의 노력, 연결의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의 삶의 방향은 자주 그 반대로 흐른다. 고난을 당할 때 친구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비수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구석으로, 골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습속이 있다. 욥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욥기, 7장 16절)
엄혹한 시절,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구석구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면, 욥기는 어쩌면 어려운 시대, 그 고통에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통해 우정과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에게 자신의 고통을 목놓아 고백하고, 제발 혼자 있게 내버려 달라는 욥의 이야기에 마침내 신의 음성이 포개진다.
“너는 산에 사는 염소가 언제 새끼를 치는지 아느냐? 들사슴이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 본 일이 있느냐? 들사슴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아느냐? 언제 새끼를 낳는지 아느냐? 언제 구푸려서 새끼를 낳는지를 아느냐? 낳은 새끼를 언제 광야에다가 풀어 놓는지를 아느냐?...”
영문 모를 고난의 현실 앞에서 비틀거리며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던 욥앞에 나타난 신, 그는 욥에게 고난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그를 장엄한 우주의 신비, 관계의 신비 앞에 세울 뿐이다. 신의 질문이 거듭될수록 욥은 점점 더 깊은 침묵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삶은 그저 신비였고, 그 신비의 고갱이에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우주의 신비가 있었다. 어려울수록, 어려울수록 내부로가 아니라 외부로 나와야 하는 이유, 신과 인간과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시대, 이야기의 본질은 이거다.
“나의 안과 밖, 신의 세계의 인간의 세계,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연결의 복잡성을 이해하기에는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
삶에 대해, 운명에 대해, 관계에 대해 겸손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정.말.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삶 곳곳에서 필요한 것은 목놓아 우는 고백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관계의 장이 만들어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