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97년 체바르 강 텔아비브 마을, 한 남자가 강둑에 서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 강 위로 머리가 넷 달린 생명체 네 마리가 날아간다. 이들은 루돌프 사슴처럼 전차를 끌었고, 큰 소리로 날개를 휘두르며 팔다리에서 불을 뿜었다. 손에 쥐어진 두루마리는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마치 <왕좌의 게임>의 한 대목을 보는 느낌. 에스겔은 그 공간에서 두루마기를 먹어야 했다. 거기에는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에스겔 시대의 신은 불가해한 존재였다. 추방된 공간에서 신의 단정함, 합리성은 부서졌다. 거대한 불길, 정리되지 않은 분노,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과 고통의 외침만 가득했다. 이야기는 협박성 레터에 가까웠다. 일말의 환대, 친절, 위로, 이딴 건 없었다(Armstrong, 2006/2010, p. 295). 에스겔의 임무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은 냉정했다.
“나 돌아갈래!”
천만에, 그런 환상은 품지도 말아야 했다. 해야 할 일은 회개, 그리고 어떻게든 변화된 시간과 공간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좋아질거야.’ ‘그래도 좋아’
이 미망에서 벗어나야 했다. 변화는 자신의 결점, 한계에 대한 처절하고 날카로운 검토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은 에스겔에게 가시와 찔레 속에서 살고, 전갈 떼 가운데서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강조한다. 심판의 시대가 지나가면 다시 회복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는 밑밥이 이야기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밑밥은 그저 밑밥. 무너짐의 심도는 깊었다. 회복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무너지는 게 필요하다고 신은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무너져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신의 대답은 한 번도, 두 번, 삼세 번도 아닌 23번. 에스겔서에 보면 “그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6:7)라는 구절이 23번이나 반복된다. 이 말은 무너짐의 사건, 재판의 시간이 23번이나 지속된다는 것인데 이쯤되면 한두번 좌절은 일도 아니라는 위안을 얻게 되기도 한다.
아울러 회복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마주하게 된다. 에스겔은 회복을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그저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잔혹성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의 고통을 적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대신 추방당한 사람들, 그들 자신을 좀 더 가깝게 봐야함을 강조한다. 그 지난하고 처절한 시간, 고통을 자신의 몫으로 소화하고 그 책임을 인정하고 심장이 부서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그 다음 단계, 회복의 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거였다(Armstrong, 2006/2010, p. 299).
에스겔의 말년, 그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야훼 삼마라 부르는 도시의 환상을 본다. 삼마는 “거기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성전은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신은 우리 옆에 있고, 누구든지 그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은유하는 환상이었다. 이 환상의 시간은 오랜 폐허 속에서의 고단한 세월을 견뎌내고 마침내 회복의 다음 챕터, 새로운 비전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포로로 잡혀간 지 25년, 예루살렘 도성이 함락된 지 14년이 지난 어느 날, 에스겔은 높은 산 위에서 회복되는 성전의 모양을 지켜본다. 성전의 측량이 다 끝나자 신의 권능은 그를 동쪽으로 난 문으로 데려간다. 신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음성은 파도가 출렁이는 소리와 같고, 땅은 광채로 환해졌다. 에스겔이 그 장엄한 광경에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사이 신의 빛, 성령은 성전을 가득 채운다(김기석, 2012, 5, 27).
성령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의 새로운 스토리, 그 감격의 챕터는 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에 몸과 마음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거다. 나의 에고, 나의 자아, 나의 교만함. 그 에고와 자아와 교만함이 나를 헤어날 수 없는 번뇌와 슬픔과 분노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하고, 새로운 성령의 바람을 내 마음 속에서 내쳐버린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너는 폭력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에스겔 28: 16)
"너는 네 미모를 자랑하다가 마음이 교만하여졌고, 네 영화를 자랑하다가 지혜가 흐려졌다."(에스겔 28:17)
내가 뭐라도 된 것으로 생각할 때 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을 놓치고 만다. 사실 우리는 매번 이 빛과 바람을 놓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매번 새로운 챕터, 회복의 챕터로 가지 못하고 고통의 장 위에서 매번 유사한 방식과 유사한 스토리로 흔들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도 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기버리기’다.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늘 기억해야 하는 거다. 그래야만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 기, 그리고 신이 인연맺어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
고개를 든다. 주변을 바라본다. 우는 이의 옆에서 같이 울고, 웃는 이의 옆에서 같이 웃는 내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흔들리는 잎새에 함께 들뜨고, 우두둑 떨어지는 가지에 내 마음을 얹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땅을 만지고,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리하여 매번 일상 곳곳에서 성령의 바람을 느끼는 내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여는 것, 세상의 많은 빛, 성령의 숨이 들어올 틈을 마련하는 것. 그 생기가 내 속에 가득차면 내 안에 있던 찌든 욕망, 정욕, 바람이 새로운 빛으로 전환되는 것 아닐까? 일단 한 걸음 한 걸음 가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