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끝까지 간다 프로젝트.
어느 삶이든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은 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아로 이어지는 기원전 7세기 무렵이었다. 히스기야는 아시리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왕이다. 그 노력은 주변의 지혜가 모아지지 않고, 히스기야 스스로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선 현명함을 택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아시리아 자체의 힘이 강력해 수포로 돌아간다. 히스기야는 대대로 특권을 누리며 살던 귀족들의 특권을 축소시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불만은 커졌다. 내부적인 불만과 외부적인 압력을 버텨내기에는 히스기야를 보좌했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독주에 취해 있었고, 자신들과 다른 의견은 취하려 들지 않았다(뭔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에 대해 당시의 선지자 이사야는 외부로부터 경고의 나팔이 울리고 있는데도 모두가 자기 이익과 욕망에 빠져 깊은 잠에 빠져있다고 한탄한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열두 살에 왕이 되어 쉰다섯 해를 다스렸다. 어린 나이에 등극한 왕, 귀족들은 급격한 정치 변동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강대국 아시리아의 그늘 아래 머무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왕을 설득한다. 므낫세는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친다.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노선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 세대에 줄어들었던 귀족들의 권한은 강화된다. 거꾸로 말하자면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는 말이다.
므낫세는 야훼만 섬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시골의 성전을 재건했으며, 바알을 섬기는 재단을 세우고, 예루살렘 바깥에서 아이 희생제를 올렸다. 귀족들의 삶은 편안했지만, 꿈도 희망도 없던 시대였고, 그렇게 세상의 불만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이 불만이 터진 것은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왕에 오르면서다. 아몬은 아버지의 트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궤도를 걸으며 수많은 재단에 희생제를 올렸고, 시골 귀족들이 주도한 궁정 봉기에 살해되었다. 성경은 이 귀족들을 암 하아레츠(땅의 사람들)라고 불렀다(Armstrong, 2006/2010, p. 269).
쿠데타 주모자들은 아몬의 8살 난 아들 요시아를 왕좌에 앉힌다. 꼬맹이였던 요시아가 어른이 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그는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와 달리 하나님, 야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는다. 기원전 622년 요시아는 유다 왕국 황금기의 위대한 기념물인 솔로몬 성전 확장 사업을 개시한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은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는 사업이었다.
어느 날 성전 수리를 진두지휘하던 대사제 힐키야가 성전 수리 중 발견했다며 율법의 서를 서기관 사반에게 전한다. 사반은 이 율법책을 왕 앞에 가져와 큰 소리로 읽었다. 대부분 학자들은 그것이 신명기 역사서의 일부였을 거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잊혀진 것이 발견된 셈이었고,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전으로 읽히기 시작했다(Armstrong, 2006/2010, p. 271).
메시지는 명확했다.
“우리 선조들이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불길 같은 야훼의 진노를 사게 되었소.”
요시아왕은 두루마리에 적힌 말을 듣자 괴로워하며 자기 옷을 찢었다. 개혁이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다. 요시아는 여성 예언자 훌다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녀에게 율법의 서는 한 가지 의미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를 저버리고 온갖 우상에게 제물을 살라 바쳐 나의 속을 썩여주었다. 그런즉 나의 분노가 불길같이 떨어지면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하리라.”
무시무시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불길에서 탈출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깊이 뉘우치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옷을 찢고’, ‘통곡’하는 요시야의 기도.
훌다는 야훼가 이 기도를 들은 후 그 땅에 내리려던 재앙을 유보했다고 말한다. 요시야는 이 기도의 무대를 넓히기로 작정한다. 곧장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소집한다. 왕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물론이고 모든 백성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다.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낭독하여 들려준다. 오래 전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 모세가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고, 이는 국가적 규모로 신앙적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했다(김기석, 2019, 10, 27 설교).
사람들은 요시아를 새로운 모세로 떠받들었고, 그를 다윗보다 위대한 왕이라 믿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외부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선사할 것이며,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아시리아가 떠난 땅을 정복한 후 야훼 신앙을 복원할 거라 믿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역사학자들은 모세오경의 마지막 권인 신명기에 이어 사무엘과 열왕기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기록들은 요시아의 종교적이고 정치적 프로그램을 강력히 뒷받침했다(Armstrong, 2006/2010, p. 275). 이 이야기들은 싸구려 국가 홍보물이 아니었다. 과거의 억압, 상처를 기억하며 야훼의 관용을 모방하려 했고, 정의, 형평,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시대, 신명기 저자들은 유대교를 책의 종교로 만들었고, 그 책에는 새로운 비전과 희망이 새겨져 있었다.
성공했을까? 멀리 보면 성공이고(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지금 이 시절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니), 가까이 보면 실패였다. 당장 성공하기에는 중동의 지도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으며 바빌로니아가 상승세를 타는 중이었다. 그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유다 왕국은 단역배우에 불과했다(Armstrong, 2006/2010, p. 283). 통곡으로 가득찬 요시아왕의 기도 앞에서 '재앙을 유보하겠다‘는 신의 음성은 진실이었다. 재앙은 유보된 것이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당시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표적인 예언자는 예레미야였다. 그가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대제사장 힐기야가 두루마리를 발견했을 무렵이었고, 예레미야는 요시아에 대한 마음과 별개로 희망보다 직시해야 할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갈 것이며, 싸우려 해보아도 승리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지난 삶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요약해보며느 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아로 이어지는 기원전 7세기를 지나면서 신의 목소리는 텍스트로 기록되고 전승되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를 지나면서 “나”를 버리고 “신”을 따르는 것이 삶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이 변화의 촉매는 폭력과 불기둥이었다.
예레미야는 신이 내려줄 새로운 미래를 이렇게 읊조린다.
“똑똑히 들어라. 내가 분노와 노여움과 울화 때문에 그들을 여러 나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이제 내가 그들을 이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이곳으로 데려와서 안전하게 살게 하겠다. 그러면 그들이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과 삶을 주어, 그들이 언제나 나를 경외하여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길이 복을 받게 하겠다. 그때에는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내가 그들에게서 영영 떠나지 않고, 그들을 잘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주어서, 그들이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잘되게 함으로 기뻐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이 이 땅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살게 하겠다(예레미야 32:37-41).”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는 주어는 내가 아니라 신의 온 마음과 정성이다. 이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놀랍다. 내가 아니라 신의 마음과 정성으로 살아내는 것, 어쩌면 우리가 삶을 잘 산다는 것은 이 문장을 잊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어는 내가 아니라 신이다.
나의 삶에, 너의 삶에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참고문헌
Armstrong, K. (2006). The great transformation : the beginning of our religious traditions.
정영목 역(2010). 축의 시대. 서울: 교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