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일어나서 먹어라.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구약성서 끝까지 간다 프로젝트

by 오윤

구약성서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강력한 드라마적 스토리를 가진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단연 엘리야다. 엘리야는 일당백으로 바알신도들과 갈멜 산에서 대결을 벌이는가 하면, 이세벨 여왕의 분노를 사서 황야의 도망자가 되는가 하면, 호렙산에서 신을 만나기도 하고, 죽을 때는 불말들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엘리야가 자신의 뒤를 잇는 후계자 엘리사에게 건넨 “엘리사의 외투”, 도망자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하며 들리던 신의 “세미한 소리” 등은 엘리야가 남긴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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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엘리야의 스토리가 펼쳐지던 무대는 기원전 9세기 말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기를 지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영토를 확장하면서 폐허가 된 도시의 주민들을 흡수하고 그들의 기술을 이용해 또다시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였다. 북이스라엘 6대왕 오므리 왕은 사마리아에 새 수도를 건설했고, 그의 아들 아합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그리스와 교역로를 확립했다.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결혼했는데 그 이름은 성경의 역사에서 사악함의 대명사였다. 그녀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들여왔기 때문이다. 열왕기상에 그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만을 섬겨야 한다고 믿었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소수의 분노를 샀고(Armstrong, 2006 /2010, p. 115), 그 중심에 엘리야가 있었다.


#9-2 이사벨.jpg 출처: https://jwa.org/encyclopedia/article/jezebel-bible

왜 엘리야는 바알 신앙에 분노했을까? 사실 이것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구약성서를 갈등의 축에서 읽자면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발걸음을 내딛던 순간부터 훗날 유대 왕국이 바빌로니아 제국 등에 의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바알 대 야훼는 강력한 갈등 축이었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바알을 이민족의 신, 타락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왜 그랬을까? 우선 바알신앙은 가나안 땅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암몬족과 여타 셈족들의 신앙에 기반한 것으로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들 종교와 동화되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흔드는 행위로 여겼던 듯 싶다. 그리고 풍요와 성을 지배하는 강력한 신 바알은 평등, 금욕적 삶을 지향하던 출애굽 정신과는 완전히 배치된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풍요’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우정과 환대 그리고 돌봄과 나눔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에 등을 돌리게 되고, 난교 등의 성행위를 종교의식으로 삼는 문화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엘리야가 바알 신앙에 문제를 제기하며 무대에 등장한 시기는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 땅도 하늘도 황폐했던 어떤 날이었다. 엘리야는 아합왕을 만나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누가 응답하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며 부르짖었다.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찌르며 광란 상태에 돌입한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엘리야 차례가 되었다. 그는 백성들을 제단 가까이 불러 모으고, 돌을 모아오게 해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 나뭇단 위에는 각을 뜬 소를 올려놓았다. 제단 둘레에 두 세 말 들이 곡식이 들어갈 수 있을 넓이의 도랑을 파고는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워다가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았다. 똑같은 일을 세 번 반복한다. 4는 땅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 3은 하늘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 그렇게 땅의 완전함과 하늘의 완전함이 만나 12통의 물이 부어지자 도랑이 넘치게 되었다. 엘리야는 땅에 엎드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한 일임을 사람들이 깨닫게 해달라고, 그리고 주님만이 주 하나님이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다 태웠고, 도랑 안에 있던 물까지 다 말려버렸다. 백성들은 놀라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하고 외쳤다. 그런 후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자, 바람이 일고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9-3 엘리야.jpg 출처: https://catholicherald.co.uk/as-with-the-prophet-elijah-gods-peace-awaits-us-at-the-heart-of-eve


그날 경쟁의 승리자는 야훼와 엘리야였지만, 그 승리의 댓가는 가혹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 가져온 왕비는 크게 분노하여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한다. 만약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도 한다. 왕비가 이토록 화를 낼 이유 역시 분명했다. 그 날,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신도들을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죽음은 죽음을 낳는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모두의 영웅이었지만, 이세벨 왕비에 쫓기게 된 엘리야는 고독하고 외로웠으며 두려웠다. 내가 엘리야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인간적 모습 때문일 거다. 어떤 경우에는 영웅적인 용기와 위세를 보이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두렵고 무력하고 고독했다.

그는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든다. 그때 한 천사가 그를 깨운다.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음식을 먹고 또 잠이 들었다. 야훼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른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리고 힘을 얻어,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른다. 이 장면은 꽤 드라마틱하고, 꽤 감동적이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훈계하지 않는다. 꾸짖지도 않는다. 단잠을 자게 하고, 먹을 것을 차려준다.


도움은 이처럼 구체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멋드러진 수사, 관념적 언어는 공허할 뿐이다. 거대한 테이블 위에서 어깨에 힘주고 공영성이 어쩌구 시민이 어쩌구 다 좋은데 그게 전부면 심각한 문제다. 설상가상 훈계와 충고까지 더해지면 정말 답이 없다. 지금 이 세상에 도망자 엘리야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살아갈 방도를 잃어버린 사람들 정말 적지 않다. 신이 그들을 토닥이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응원해주면 참 좋을 것 같다. 나,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도 누군가에게 작은 밥상 하나 차려주는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진심이 담긴 따뜻한 손길, 우정, 연대.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다.



<참고문헌>

Armstrong, K. (2006). The great transformation : the beginning of our religious traditions.

정영목 역(2010). 축의 시대. 서울: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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