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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오사 May 10. 2020

나의 풋살 도전기

리버풀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문제가 많다. 

리버풀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문제가 많다. 


'저는 리버풀을 좋아해요'라고 하는 순간 남자들은 홍해 바다 갈리듯 두 부류로 나뉘었다. 갑자기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며 '언제부터 좋아했어요?'하고 묻는 이들과 안경을 고쳐 쓰며 '그렇게 안 봤는데'라며 고개를 젓는 이들. 전자는 주로 갖은 수모를 겪어가면서도 2008년 이스탄불의 기적을 추억하는 이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유구한 역사와 자본으로 대표되는 어떤 팀 팬들이었다. 애석하게도 남자 사람들과의 손쉬운 대화 주제를 고른 나는 아주 높은 확률로 젊은 꼰대들을 양산해 내고 있었다. 콥꼰대 혹은 해축꼰대.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들은 99%의 확률로 물었다. 


"그럼 공도 차고 그러세요?"

"아, 아뇨. 그렇진 않구요."

"아..."


방금 전까지 생기 넘치던 그들은 짜게 식어갔다. 나는 무언가 실망을 준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리버풀 감독 클롭을 사랑하는지 덧붙이며 "공차는 여자분들은 잘 못 봐서요." 하고 말했다. 실제로 주변에 공을 차는 여자는 본 일이 없으니 찾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해도 아무 이견이 없었다. 그리던 어느 날, 장장 2시간 동안 조기 축구 썰을 늘어놓는 한 해축꼰대(해외축구 꼰대)의 한 마디가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여자들도 공 많이 차던데. 너도 한번 찾아봐." 순간 아차 싶었다. 그간 수없이 얼버무린 대답과 함께 '여자는 공을 찰 줄 몰라.'라는 편견에 얼마간 일조한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인스타그램을 뒤져 곧바로 한 여자 풋살 동호회에 카톡을 날렸다. '이번 주 주말에 참여 가능할까요?'


우중충하고 습한 어느 여름의 끝자락, 나의 첫 풋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예비 회원 승인 절차를 끝내고 신림동에 위치한 오래된 상가 지하로 오라는 답신을 들을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 불꺼진 지하주차장에 휴대폰 지도를 들고서 헤매기를 십여 분. 기둥과 벽에 붙은 OO 풋살장 표지를 따라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해야 할 것 같은 문을 열자 또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겨우 일으킨 나의 심장 BPM도 계속해서 빨라져 갔다. 초록색 인조 잔디가 깔려있고, 격투기 경기장의 철장처럼 검은 그물이 처져 있는 바로 그곳. 실내 풋살장이었다. 기웃기웃 고개를 돌리다 경기장의 반대편 구석을 보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감자탕에 소주를 털러 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생기나 활력보다는 어딘가 심하게 지쳐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런 얼굴을 위로 흐르는 땀방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내 쪽을 쳐다보는 이들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 

내 빨간 아디다스 풋살화를 처음 뜯은 날.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곧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발등이 아니라 발바닥을 이용해서, 힘을 빼고 직선으로, 차려는 방향을 쳐다보면서,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하면 된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기본만 지켜도 중간은 할 수 있어요." 하나하나 패스 자세를 잡아주고 슈팅을 알려주는 코칭 스태프에게서 어떤 기강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작된 연습 경기. 무조건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준비운동부터 최선을 다했다. 나는 기본을 무시하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사력을 다해 달렸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넘긴 김밥은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았다. 골대 앞에 서 있다가 극한의 반사 신경으로 골은 하나 넣었지만 어디까지나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패스를 받으면 우왕좌왕하다 뺏기고, 미끄러져 넘어지고, 공을 따라 달리다 결국은 필드에 드러눕고 말았다. 태어나 그렇게 힘든 운동은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너무 힘든 나머지 잠시 기억을 잃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첫 풋살을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다소간 당당하게 '저 풋살 하고 있어요'하고 말하자 축구꼰대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보통이 아니시네요."

"처음 봤어요. 공차는 여자는..." 


애초에 편견을 깨보자며 시작한 풋살이었지만, 또 이런식이라니. 하지만 이들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나는 풋살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때의 이미 나는 골 맛을 알아버렸고, 공차는 여자가 많단 것도, 그런 여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된 기분이 어떤 것인지도 안 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시때때로 축구와 엮인 여자는 어딜가나 그 희소성 자체로 문제적이었다. 리버풀을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공을 차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비 오는 일요일 오후, 나의 풋살 도전기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첫날의 메스꺼움이 오르는 것도 잠시, 한창 풋살의 재미를 알아가며 한 골 두 골 넣고 오던 주말이 떠오른다. 현재는 코로나 19로 대부분 공용 풋살장이 문을 닫았다. 풋살처럼 휘슬 한 번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에서는 모두의 노력이 수반되어야겠지만 크고 작은 풋살의 기술을 인생에 적용해볼 순 있을 테다. 편견에 맞서는 것, 기본을 지키는 것, 다시 시작하는 것. 분명 리버풀도 이렇게 매 시즌을 다시 시작해 우승 코앞까지 갔을 것이다. 




image: https://url.kr/pHzc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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