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4월도 다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정환씨는 오늘도 지난 주말과 마찬가지로 푸른색 롱패딩을 입고 지하철에 올랐다.
이제는 덥기까지 한 밖과는 다르게 지하철 안은 그래도 아직 선선했다.
오늘은 롱패딩 안에 반팔을 챙겨 입고 나왔다.
반팔에 롱패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조합이지만, 정환씨는 이렇게 롱패딩을 입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약속 장소인 안국역은 앞으로 네 정거장이 남았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정환씨는 지금도 가슴이 뛰었다.
오늘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온라인 카페에서 그 사람, ‘이승환진짜부인’을 알게 되었다.
선물로 받은 몬스테라를 잘 키우는 법을 찾기 위해 가입한 카페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이승환진짜부인’. 정환씨도 좋아하는 가수인 이승환의 팬인가 싶어서 눈에 띄었다가, 게시글들마다 따뜻한 투로 댓글을 달고 정보를 알려주는 모습에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꽃집을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식물원에서 일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승환진짜부인’은 그때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냥 식물을 좋아해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얼굴도, 나이도, 진짜 성별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터 정환씨의 몬스테라는 시들시들하다가 노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이 몬스테라 키우는 법이라고 올린 게시물과 댓글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몬스테라가 병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당황한 정환씨는 몬스테라의 사진을 찍어서 부랴부랴 게시판에 글을 썼다. 식물에 대해서 잘 모르던 정환씨는 어떻게 이 몬스테라를 받게 되었는지, 자신이 어떻게 관리했는지 등 최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글을 적었다. 형식적인 가입 인사 외에는 처음으로 쓰는 글이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달아준 이런저런 댓글들 중에 ‘이승환진짜부인’의 정성스러운 장문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들의 처방과는 다르게 정환씨의 마음을 먼저 걱정해 주었다. 그리고 상냥하게 다양한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누군가는 그냥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식물 하나였다.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햇빛도 안 들어오는 자신의 집에서 식물을 키운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반 포기하고 있던 정환씨였다. 하지만 ‘이승환진짜부인’은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살릴 수 있다고 했고, 식물을 잘 모르는 정환씨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직접 보면 더 확실히 진단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해주기도 했다.
정환씨는 난생처음으로 분갈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이승환진짜부인’의 말처럼 몬스테라의 뿌리는 화분 안을 꽉 채워 칭칭 감겨있었고, 흙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환씨는 ‘이승환진짜부인’이 알려준 <꽃집남자>라는 분갈이 유튜브 영상을 보며 조심스레 따라 했다. 그리고 카페 게시판에 3일에 한 번씩 몬스테라 관찰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승환진짜부인’은 정환씨의 게시글에 빠짐없이 댓글을 달아주고 응원해 주었다. 나중에는 1대 1 대화창을 통해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정환씨는 깨달았다.
‘이승환진짜부인’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진짜 부인인지 가짜 부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곤란했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 만나고 싶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방에서 이승환의 노래만 몇 시간이고 함께 부르고 싶었다.
정환씨의 몬스테라가 결국 샛노랗게 변해버린 날.
‘이승환진짜부인’은 자기가 제대로 돕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정환씨는 그동안 너무 애써줘서 고맙다며 밥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사실 거절당할 것을 각오했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친절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정환씨는 용기를 냈다.
그리고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1:1 대화창에는 세 글자 ‘좋아요’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2주 후 주말 저녁 6시에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정했다.
두 사람 집의 중간지점이기도 하고, ‘이승환진짜부인’의 선약이 그곳에서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환씨는 푸른색 롱패딩을 입고 나가기로 했다. ‘이승환진짜부인’은 붉은색 목도리를 하기로 했다.
오래된 영화처럼 서로 연락처도 모른 채 이 단서만으로 서로를 알아보자며 웃었다.
그렇게 약속을 정한 다음날,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계엄은 진압되었지만, 매 주말 저녁 안국역에서는 집회가 열렸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정환씨는 ‘이승환진짜부인’을 만날 수 없었다. 푸른색 패딩을 입은 정환씨는 붉은 목도리를 하고 있는 무리들 가까이 갔다가 쌍욕을 들어야 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런 무리들 속에 ‘이승환진짜부인’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정환씨는 한없이 고독했다.
그 후로 정환씨는 온라인 카페에서도 ‘이승환진짜부인’을 만날 수 없었다.
1대1 대화도, 쪽지도, 어느 것에도 답이 없었다.
혹시 약속날짜를 잘못 안 것은 아닌가 싶어서 다음 주 주말도, 그다음 주 주말도 정환씨는 똑같은 푸른색 롱패딩을 입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갔다. 갈수록 집회의 규모는 점점 더 커져갔고, ‘이승환진짜부인’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봄이 되었다.
정환씨는 오늘도 여느 주말과 같이 푸른색 롱패딩을 입고 지하철에 올랐다.
어째선지 집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정환씨는 본의 아니게 집회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다.
정환씨는 바랐다.
그 사람이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외모에 실망한 나머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기를.
그리고 카페에서 자신을 차단한 것이기를.
그냥 자신에 대한 실망만을 가진 채,
아무 나쁜 일 없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함께 숨 쉬고 있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온라인 카페 활동에 서툴렀던 정환씨는 카페 닉네임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승환진짜부인’이라는 닉네임을 썼던 강필석씨는 ‘러브홀릭’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으로 이번에는 누구를 골탕 먹일까 히죽거리며 게시판을 훑어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