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한쪽 구석에서 크로키를 하던 도현은 손을 멈추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서울의 지하철은 어색하면서도 설렜다.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서 뿌리를 내린 지 10년.
붓을 꺾겠다는 도현의 단호한 결심은 귤농사를 짓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흐려졌다.
농사일이 손에 익지 않아 몸이 고되고 피곤할수록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뜨겁게 피어올랐다.
'그래,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만 한 결심인데 다시 번복한다고 해도 역시 아무도 모르겠지.'
결심만큼이나 가벼웠던 번복. 그렇게 한 점씩 쌓아왔던 작품들은 우연히 제주를 찾은 한 전시 기획자의 눈에 띄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지하철 차창에 비친 도현의 모습은 어색했다.
전시 오픈 행사를 앞두고 변변한 옷이 없어서 난처해하는 자신을 위해 기획자가 섭외해 준 의상실의 정장이었다.
멋스럽기는 했으나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복장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발견했으니 이제 평화롭게 귤농사를 지으며 살던 시절은 끝났다며 시원하게 웃던 기획자.
그가 섭외한 대형 갤러리에 이미 도현의 작품들은 전시되어 있었고, 도현은 이렇게 낯선 모습을 하고 갤러리로 향하고 있었다.
겨우 도망쳤는데 다시 화가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인생 참 알 수 없구나… 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매무새를 정리했다.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 어게인’은 도현의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자신의 작품들이 세련된 타이포그래피와 함께 여러 모양으로 가공되어 전시작 곳곳을 꾸며주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았던 모든 집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커 보이는 하얀 공간 안에서, 자신의 작품들은 작가와는 다르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걸려있었다.
'원래 이런 공간에 어울리는 녀석들이었는데 내가 너무 창고에만 처박아 두었었구나.'
자신의 자식과도 다름없는 작품들을 돌아보며 도현은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그날 전시기획자가 우연히 도현의 집 앞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날 도현이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들은 여전히 도현의 집 창고 안에서 빛을 읽고 곰팡이들에게 먹혀버렸을 것이다.
“작가님, 오셨네요! 어유, 근사한데요!”
어느새 도현에게 다가온 기획자가 도현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도현은 어색하게 내민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런 대단한 곳에서 전시도 하고…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하하. 앞으로 작가님과 함께 할 일이 많습니다.”
기획자는 잠시 후에 행사에 대한 안내를 해주겠다며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전시인데 정작 자신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또한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현은 관람객처럼 자신의 그림들을 훑어보다가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직 전시 오픈 전인데 저 사람은 누구지?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뒷모습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걸음이 옮겨졌다. 가까이 갈수록 낯익은 뒷모습. 10년이 지나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뒷모습이었다.
희수였다.
희수는 도현이 그린 자신의 초상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희수가 SNS에 올렸던 스튜디오 웨딩사진을 훔쳐보고 모티브로 삼아 그린 그림이었다.
도현은 귀 끝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획자에게 창고를 열어주고 전시가 될만한 그림은 모두 꺼내가시라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 그림이 이렇게 전시장에 걸려서 당사자를 마주 보리라고는 도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거 나야?”
도현이 뒤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뒤돌아 선 희수가 물었다.
도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희수의 목소리만 공간 안에 울리는 느낌이었다.
희수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야위어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앳된 모습은 이제 다 사라지고 어른이 된 희수가 낯선 모습으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파혼한 입장에서 이 그림은 좀 기분 나쁘네. 얼굴이라도 좀 더 예쁘게 그려주던가.”
도현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이 사랑했고, 많이 그리워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도현의 마음의 절반을 차지하고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존재였다.
“아… 미안. 나도 이 그림을 전시하려던 건 아닌데, 이게 왜… 미안, 이건 떼자고 할게.”
당황한 도현의 변명에 희수가 픽 웃었다.
“됐어. 김대표님 고집 세서 자기가 픽한 그림이면 절대로 안 뗄 거야. 그런데 출세했네? 김대표님이 신인작가 전시를 직접 기획하는 건 흔치 않은데, 게다가 여기서 전시를 하고.”
“아… 그게… 우연히…”
“우연히?”
희수는 멋쩍어하는 도현의 얼굴을 보고 눈빛이 변했다.
“너 이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 게 작가한테 어떤 의미인 줄 알아?”
“어?”
“김대표님이 원석을 발견했네 어쩌네 하면서 잔뜩 들떠서는 내 전시 일정까지 뒤로 미루고 네 전시를 걸었어.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 하고 와봤는데, 너였어? 그것도 우연히 전시를 하게 됐다고?”
희수는 도현에게 쏘아붙였다. 도현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맨날 자기 힘으로는 뭘 갖겠다는 욕심도 없고, 이루고 싶다는 야망도 없고, 그냥 대충 자기 하고 싶은 것만 대충 하면서 사는 인간. 그게 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대충 사는 네가 이렇게 우연히 내 앞을 가로막아? 나는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고 노력했는데!”
도현은 지난 10년 전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함께 그림을 그리던 대학시절.
졸업 후 유학을 떠난 희수와 남겨진 자신.
그때 희수는 함께 어떻게든 해보자고 했고, 도현은 자신이 없었다.
희수가 떠나고 없는 서울이 싫어서 도망치듯 내려온 제주에서 도현은 붓을 꺾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넌 비겁해.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아. 네 힘으로 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있어?”
쏘아붙이는 희수 앞에서 도현은 아직 어렸던 20대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나 원래 그런 놈이야… 그걸 알아서 네가 그렇게 떠났던 거잖아.”
“내가 떠난 게 아니라 네가 떠민 거지, 이 비겁한 새끼야.”
희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갤러리를 휙 둘러보았다.
“이 그림들도! 다 내 그림하고 똑같잖아! 다 표절이야! 그림도 한 장 네 힘으로는 못 그리잖아!”
도현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비겁하다고? 내 그림들이 표절이라고?”
“그래! 넌 비겁하고 이 그림들은 다 표절이야! 이건 명백한 복제야! *복제권 침해!”
도현은 법적인 용어를 내미는 희수에게 처음의 애틋함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의 작품을 변호하는 작가로서 희수에게 입을 열었다.
“복제권 침해? 내가 네 그림을 복제했다는 거야? 나는 지난 10년 동안 네 그림을 본 적도 없어. 다 내가 봐 온 풍경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담은 거라고!”
“너만의 방식? 아니, 이건 대학교 때 내가 처음 시도했던 방식이야. 고흐와 모네의 중간 어딘가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이건 너의 방식이 아니야. 내가 고안해 낸, 나만의 구체적인 표현방법이야. 이건 명백한 *2차적 저작물 작성권 침해라고!”
도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고흐처럼 그리던 나와, 모네처럼 그리던 네가 그 중간지점을 찾아보자고 한 거 기억 안 나?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실험했던 거야. 너 혼자 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내 그림은 네 그림 자체를 단순 복제한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내 감정으로 새롭게 창작한 거야. 저작권법에서도 *'독창성이 있으면 별개의 저작물로 인정한다'라고 되어있어! 그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지?”
희수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최초 고지! 선공개가 저작권 인정에서 중요한 거 몰라? 이 스타일은 이미 내가 3년 전에 발표했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내 고유의 스타일이라고! 선공개한 내가 우선이야! 네가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혼자 이러고 있을 때, 나는 피나게 노력해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도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네 그림, 네 스타일. 저작권 등록은 했어? 등록도 안 하고 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
희수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등록은 권리 성립 조건이 아니야! 창작한 순간부터 자동으로 보호된다고! 그러니까! 이 스타일의 권리는 나에게 있고, 너는 내 저작권을 침해했어.”
도현은 고개를 돌려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이거 봐. 내 그림은 어떤 사람은 고흐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모네 같다고 하기도 해. 그러면 내 그림하고 똑같다는 네 그림도 그런 소리를 듣겠네? 네 그림은 고흐를 표절한거야?”
희수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반고흐는 죽은 지 70년이 넘었어. 공공영역이 됐다고! 스타일을 차용해도 문제없어! 하지만 넌 살아있는 나를 따라한 거야!”
도현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쓸쓸하게 희수를 바라보았다.
희수는 도현의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10년 전 그날의 표정이었다.
도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만하자. 내가 왜 지금 너하고 이렇게 싸워야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차피 화가는 진작에 때려치웠고, 이제는 귤농사가 편한 사람이야. 이 스타일이 네 거라면 앞으로는 계속 너 혼자 그려. 하지만, 이 그림들은 나한테는 진짜야. 다시 창고 속에 처박혀서 썩더라도 너한테 표절작 취급받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고. 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내 삶은 이거야. 잠깐이지만 반가웠어.”
도현은 그때와 똑같았다. 다시 희수에게서 도망가려 했다.
희수가 도현에게 소리쳤다.
“이 비겁한 새끼야! 또 이렇게 혼자 잘난 척하고 도망갈 거야?! 한 번도 붙잡아주지도 않고! 그렇게 나 떠밀어놓고! 내가 돌아왔을 때는 찾을 수도 없게 꼭꼭 숨었으면서! 이렇게 겨우 만났는데 또 도망가? 도망가지 말고 싸워! 싸우면서 내 눈앞에 있으라고! 이기기도 하고 져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내 앞에 살아 있으라고! 이 나쁜 새끼야!”
희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도현은 희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흐느끼는 희수를 안아주었다.
품 안의 희수는 10년 전보다 많이 작아져 있었다.
그제야 희수의 그동안의 아픔과 치열했던 삶의 시간들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다.
도현도 목이 매였다.
“미안해… 내가 도망쳐서 미안해…”
희수는 도현의 품속에서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10년 전과는 다른 결론을 맺기를 서로의 마음으로 간절히 바랐다.
한편, 전시기획자 김대표는 목덜미에 돋아난 닭살을 긁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2년 후.
두 사람은 스페인에서 열리는 <아르코 국제현대아트페어>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해서 자신들의 작품을 세계에 선보였다. 현지 언론에서는 ‘고흐와 모네가 현대에 다시 태어나서 연인이 되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두 사람은 ‘*빈센트와 클로드’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했다. 그들의 뒤에는 뿌듯한 표정의 김대표가 늘 함께 있었다.
<아르코 국제현대아트페어>의 셋째 날, 취재를 위해 한국에서 온 <월간미술>이라는 미술잡지사와의 인터뷰가 있었다. 차기작을 묻는 기자에게 희수는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켰고, 도현은 부끄러운 미소를 띠며 희수를 바라보았다.
*복제권 침해: 복제권은 저작자가 자신의 저작물을 복제할 수 있는 권리로, 인쇄, 사진, 녹음, 녹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작물을 재현하는 것을 포함한다. 타인의 저작물을 무단으로 복제하는 것은 복제권 침해에 해당한다. - 출처:「저작권법」제2조 제22항, 제16조
*2차적 저작물 작성권: 원저작물을 번역, 편곡, 변형, 각색, 영상 제작 등으로 새롭게 창작할 권리. 원저작자의 허락 없이 이러한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하는 것은 침해에 해당할 수 있다.
- 출처:「저작권법」 제5조 제1항, 제22조
*독창성이 있으면 별개의 저작물로 인정한다: 「저작권법」 제5조 제1항은 원저작물을 번역, 편곡, 변형, 각색, 영상제작 등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2차적 저작물)을 독자적인 저작물로서 보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대법원은 1995. 11. 14. 선고 94도 2238 판결에서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저작물이기 위하여는 문학·학술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창작물이어야 하므로 그 요건으로서 창작성이 요구되나, 여기서 말하는 창작성이란 완전한 의미의 독창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어떠한 작품이 남의 것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고 작자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 또는 감정의 표현을 담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판시하였다.
따라서, 기존 저작물을 참고하거나 영향을 받았더라도 새로운 독창성을 가진 창작물이라면 별개의 저작물로 인정되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최초 고지: 저작권은 등록하지 않아도 권리가 발생하고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지만, 등록을 하는 경우 몇 가지 추가적인 법적 효과를 가진다. / 창작연월일 또는 맨 처음 공표년월일이 등록된 저작물은 등록된 연월일에 창작 또는 맨 처음 공표된 것으로 법적 추정을 받는다. 서로 같거나 유사한 저작물로 시비가 붙었을 때 어느 저작물이 먼저 창작되었는지 법적 추정력을 부여받는 장점이 있다. 상대방에게 입증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은 자신의 저작물이 등록저작물보다 먼저 창작되었다거나 또는 등록저작물의 창작년월일이 허위라는 것을 증거 자료를 통해 입증할 부담을 안게 된다.
-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법 문서 - 저작권 발생과 등록 Q/A
*등록은 권리 성립 조건이 아니고 창작한 순간부터 자동으로 보호된다: 저작권은 창작과 동시에 발생하며, 등록 여부와 관계없이 보호된다.
- 출처:「저작권법」제10조 제2항
*반고흐는 죽은 지 70년이 넘었다. 공공영역이 됐다.: 저작권 보호기간은 저작자의 사망 후 70년까지이며, 그 이후에는 저작권이 소멸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 출처:「저작권법」제39조 제1항
*빈센트와 클로드: 화가 고흐와 모네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와 '클로드 모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