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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싸 Aug 21. 2023

남들과 비교하세요.

(자존감을 키우세요)

 나는 삼성이 만든 디자인 학교인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 삼성디자인학교 - 현 ‘삼성 디자인 교육원’)를 졸업했다. 아니, 정식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졸업은 맞지 않는 표현이고, ‘수료’를 했다. 처음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담근 것은 종말이 오네,마네하던 1999년. 그림은 좋아하는데 딱히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미대를 갈 형편도 안되었던 나는 '만화라면 할만하지 않을까?'하는 어중간한 생각으로 만화를 공부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비록 집안사정을 핑계로 학업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처음 입학할 때의 마음가짐과 같이 어중간하게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그곳에서 처음 배운 쿽이라는 프로그램과 편집디자인에 매료되어 인쇄와 디자인 계통을 몇 년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스물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기왕 이 판에 들어왔으니 제대로 배워서 디자이너의 길을 가보자는 다짐으로 sadi에 입학했다. 그 사이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본문과 상관없는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sadi는 당시만 해도, 국내 4년제 대학 디자인과에 준하는(sadi출신은 대체로 타 학교들을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실력과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입학도 어렵지만 졸업이 훨씬 어려운, 학사관리가 엄격한 학교로 유명했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미술과 디자인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디자인에 대한 즐거움과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sadi의 모든 과정을 마쳤다.


 sadi에서 교수님들의 긍휼과 은혜로 어찌 어찌 졸업은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여러 회사들에서 나를 데려가거나, 교수님들이 나를 어느 회사로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sadi의 간판이 있으면 졸업과 동시에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하지만 웬걸? 다른 동기들의 취업소식이 하나둘씩 들려오면서 나는 조급해졌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유수의 회사들에 척척 들어간 걸까? 남들처럼 미래에 대해 제대로 준비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 신기하다.

그 누구에게도 너는 도대체 어떻게 그 회사에 들어간 거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계속 기다리면 결국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에서 나를 데려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다가 결국 최후의 1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결심한 것처럼 당당하게 선포했다. 나는 취직을 하지 않고 내 스튜디오를 차리겠노라고!


 아무런 준비 없이 일단 시작하기로 했지만, 막막하지는 않았다.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방법을 몰라 실패했으나, sadi라는 간판이 나를 꽃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직장생활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자유로운 나의 영혼을 출퇴근이라는 굴레에 묶어둘 수 없다, 나의 사무실은 온 세상이다.’라는 헛소리를 하며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실제로 나는 스튜디오를 차리자마자, 만화를 배우던 시절 은사선생님의 전시회 기획을 해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 준비 없이 지인의 도움으로 시작한 일. 나는 그것이 나의 실력이라고 믿었고, 그 일들을 통해 이어지는 다른 일들 역시 그냥 내가 잘해서 하게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튜디오를 시작하면서 철저히 은사선생님의 덕을 본 것이고, 이후에 이어진 일들은 다 그로부터 파생된 일들이다. 내가 잘해서, 내 실력을 통해 맨땅에서 헤딩하고 영업을 잘해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후의 시간 동안, ‘나는 그때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 따위의 푸념만 늘어놓으며 한심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정말 잘하고 실력이 있었으면, 왜 모두가 나를 외면했을까? 왜 나는 결국 망한 디자이너가 되었을까? 다른 이유 없다. 나의 실력이 그만큼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인맥으로, 운으로 어떻게 어떻게 이어갔지만, 그것을 지속시킬만한 실력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sadi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잘하는 친구들은 나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하고 열심히 했다. 다른 친구들이 주어진 과제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며 디자이너로서의 실력을 닦을 때,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청승을 떨고, 청춘의 낭만 같은 헛소리를 떠들며 아무도 시키지 않은 교내 캠페인 활동을 하거나, sadi일상 브이로그 따위를 찍으며 혼자 킥킥거리곤 했다. 얼마 전에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그 시절 영상을 보면 모두가 열심히 밤을 새우며 과제를 하고 있는데, 그곳에 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 친구들을 찍으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sadi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공간이며 시간이기에 그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삭막하게 자신의 과제만을 들여다보기에는 우리의 청춘은 너무 빛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과제보다,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었다. 다른 친구들의 과제는 디자인이었고, 나의 과제는 사람, 그 친구들이었다.

 그때 나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당시에 내가 아주 존경하던 원대연 학장님의 sadi 인터뷰 기사의 타이틀을 인용하여 스스로 답을 주고 싶다.


[애인도 낭만도 잠시 잊어라, 10년 뒤 보장한다]


당시 나는 애인도 있었고, 낭만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10년 뒤, 그 예언처럼 나는 망했다.


 동기 중에 모 스튜디오를 시작한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조합을 생각하면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느낌이지만 따로 떼어놓으면 무언가 허전한 서수남-하청일 같은 듀오인데, 그 두 사람은 졸업도 훨씬 전부터 디자인스튜디오를 결성하고, sadi의 동문 1호 인큐베이팅 사례가 되어, sadi 전산실 한쪽 공간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디자인에 미친 사람들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서로 보완하며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왔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중 한 곳으로 우뚝 서 있다.

 나는 졸업 후에도 이들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하고 내가 많이 귀찮게 하기도 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쌓아왔는데, 내가 한창 망해가면서 결국 이들을 향한 못난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먼저 연락을 안 하기 시작했다(하긴 그러면 자기들이 먼저 연락을 할 뻔도 한데, 자기들은 한 번도 먼저 연락 안 했으면서 내가 연락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그 두 사람은 나에게 항상 좋은 영향을 주는 멋진 동료들이자, 바라보는 지향점이 되어주었고, 동시에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기사를 볼 때마다 항상 찾아서 꼼꼼히 보면서 내가 괜히 뿌듯해하다가도 나의 현실을 보며 씁쓸하게 창을 닫고는 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들처럼 잘 돼야지 하는 동기부여의 모델이 되어주었지만, 점점 격차가 벌어지면서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패배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못났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들과 나를 분리하기가 어려웠고, 나를 나 스스로 인정하고 바라볼 줄을 몰랐다. 살다 보면 주변에 그런 존재 한 두 명쯤 있을 것이다. 가까운 형제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엄친아/엄친딸로 등장해서 저녁식탁에 오르내리며 체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막연히 연예인을 보고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콤플렉스, 열등감. 그런 이름의 것들이다.

 자신의 마음이 건강할 때는 그 감정이 오히려 삶에 자극이 되고 활력이 되기도 한다. 골대를 바라보고 달리며 언젠가는 골을 넣겠다고 다짐하고 골대와 점점 가까워지는 삶. 그것은 우리의 오늘을 힘내게 하고 내일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을 때는 그 골대가 한없이 멀어 보이고 좁아 보이기까지 한다. 하프라인까지 달려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택도 없는 슛만 날려가며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죄 없는 잔디만 쥐어뜯어댈 뿐이다.


 sadi는 곧 폐교를 앞두고 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은 sadi의 모기업인 삼성전자에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동문들을 모으고 동문회를 만들 준비를 하며 몇 년 만에 그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멋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또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많이 건강해진 나는 그들과 반갑게 다시 만났다. 그들의 더 발전한 모습이 내 일처럼 기뻤다.

 내 스스로 내가 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을 때는 이렇게 그들을 편하게 마주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마음속에 씁쓸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예전의 그 마음이 시기와 열등감이었다면, 지금의 마음은 부러움과 애틋함 같은 성격이었다.

 나는 지금 비록 디자이너로서 그들처럼 인정받고 우뚝 서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그들과 나의 길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자신과 같은 길을 똑같이 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냥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목적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우리는 수많은 여러 갈래의 길을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오르막길만 지겹도록 나오고 누군가에게는 내리막길만 시원하게 뚫려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길은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 넘어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폭신한 잔디밭을 지나기도 한다. 모두의 길은 다 다르다. 모두의 삶도 다 다르다. 타인의 삶을 보고 자신이 파 둔 열등감의 우물 속에 빠져 삶의 소중한 시간들을 헛되게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와 비교하려고 하기 전에, 스스로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잘 파악해야 한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나는 잘났어, 나는 모자라. 이러지 말자는 이야기다.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결국 타인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저 사람보다 이게 부족하네, 이게 잘났네 하는, 비교의 틀 안에 갇혀버린다.

 스스로가 항상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기를 쓴다던지, 블로그를 한다던지 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밖으로 꺼내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나중에 그 글들을 다시 보면 반드시 부끄러운데, 그건 그만큼 스스로가 성장했다는 증거가 된다.). 주변에 자신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SNS나 기고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받는 것도 좋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자기 것만 들여다보면 금방 썩고 도태된다. 발전이 없는 사람이 된다.


 스스로가 자신을 잘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때 보람을 느끼는지, 그것을 하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같은 건강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스스로의 삶에 동력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결국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논현동 보전빌딩 서관 sadi,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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