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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싸 Sep 11. 2023

혼자 할 수 있어요.

(사업은 혼자 하면 벅차요)

 작은 참고이미지와 각주가 왕창 달린 손 많이 가는 단행본 디자인 작업을 하나 하고 있었다.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이 오후 2시인지 새벽 2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점점 비대해지는 파일 크기를 감당하지 못한 나의 유일한 사업파트너 아이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속적으로 세이브를 누르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이제 절반 정도 진도가 나갔을까? 이전 챕터의 수정본을 메일로 보냈다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메일함을 열었다. 그리고 읽지 않은 메일함엔 낯선 발신인으로부터의 의뢰가 도착해 있었다. 블로그를 통해 나를 알게 되었고, 의학 관련된 편집디자인 작업을 의뢰하고 싶노라고. 하지만 그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일정은 작업량에 비해 너무 빠듯했다. 텍스트도 적은 양이 아니고, 제공하는 사진을 일러스트로 그려서 넣어야 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당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거절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하고 있는 일과 병행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일의 일정도 너무 급했고, 매일 계속되는 내용추가와 수정에 삼시 세 끼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두고 미팅을 다녀오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결국 많은 고민과 속상함 끝에 다음을 기약하며 새로 들어온 일은 거절해야 했다. 소개를 통해 나에게 연락을 했다던 그 클라이언트는 이후 다시는 나를 찾지 않았다.  


 그런 비슷한 일들을 종종 겪고 나서는, 별로 돈이 되지 않으면서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은 일은 웬만하면 거절을 하는 정신 나간 습관이 생겼다. 이 일에 매여서 돈도 제대로 못 벌고 고생만 하고 있을 때, 거절할 수 없는 큰일이 들어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니 이런 자잘한 일은 받지 말고 큰일이 들어오면 거기에 최선을 다해야지… 언제든 일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던 나의 그 오만하고 겁도 없던 생각으로 나는 결국 망했다.

 

 앞의 이야기는 물리적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정치적인 성향, 환경에 대한 철학, 어쭙잖은 정의감 등등의 것들로 자신을 기꺼이 찾아준 기회를 뻥뻥 차버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나처럼 무언가 의식 있는 디자이너인 척하면서 약자를 위해서 내가 가진 재능을 쓰겠다고 하고, 특정 대기업의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떠들고, 지금 이 정권의 시녀가 되지는 않겠다며 내가 지지하는 정당으로 정권이 바뀌면 국가를 위해 어용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건방을 떠는 일은 여러분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그때로 돌아가서 이빨을 다 털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때의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경제적 자유. 그것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특히 전업 디자이너 중에 몇이나 될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이루어야 한다. 돈을 버는 일보다 자신 스스로의 색깔과 가치를 생각하며 일을 가려서 하겠다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내가 해봐서 안다. 그러면 완전 쫄딱 망한다. 제발 먹고사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시 가장이라면 더더욱!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혼자 일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사장이 되고 직원이 한 명 있는 것은 어차피 사장 마음대로 할 테니 별 다를 바가 없고, 동등한 위치를 가진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책임을 나누어서 일을 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온전히 관리를 담당하고, 나머지 사람이 디자인 실무를 진행한다던지, 누군가는 오랜 기간 끈기 있게 할 수 있는 전통적인 디자인 작업물을 담당하고, 다른 사람은 세련된 감성으로 트렌디한 디자인을 뽑아낸다던지 등등, 나는 주위에서 두 명 이상의 동료들이 모여 1+1=3,4 혹은 그 이상이 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다양한 색깔의 포트폴리오를 쌓을 수 있는 것도 굉장한 장점이고, 무엇보다 들어오는 일을 끊임없이 어떻게든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아주 크다(둘 중 덜 바쁜 사람이 미팅을 다녀와서 함께 역할을 나누면 되니까). 그에 반해 나처럼 혼자 하던 사람들은 생각대로 일이 잘 되지 않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직장으로 돌아가거나 전직을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누차 말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양이 지극히 제한적이다. 거기에다가 내가 앞 챕터에서 밝힌 것처럼 오랜 시간 공들인 일들이 엎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혼자서는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모여 안정적으로 스튜디오를 꾸려가는 케이스가 주변에 몇 있다. 그들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여럿이서 팀을 꾸려서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는, 구성원들의 조합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은 많은 부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고, 그만큼 각자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성격이나 취향은 물론이고 선호하는 디자인 스타일과 잘하는 작업의 종류도 다르다. 앞서 이야기했던 ‘모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두 사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10년이 넘는 기간을 함께 하며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아예 각기 다른 분야의 프로젝트를 따로 진행하면서, 안정적으로 구축된 스튜디오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각자의 팀에 맞추어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아예 전공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시너지를 내며 브랜딩과 그래픽 디자인에서 제품디자인을 거쳐 공간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히며 빠르게 회사를 성장시킨 친구들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생각보다 많은 팀이 불균형한 포지션으로 일단 함께 일을 시작하고 보는 경우가 많다. 뛰어난 한 사람이 주도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돕는 형태인데, 이렇게 시작하게 되면 각자가 나름의 불만이 쌓일 확률이 크다. 항상 일이 잘 되기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겠으나, 일이라는 것이 항상 잘될 수만은 없는 법, 언젠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하는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주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혼자 일을 다 만들고 상대는 수동적으로 따라오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고, 따라가는 사람은 주도하는 사람이 독단적이라거나 자신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 이상으로 팀을 꾸려서 하다가 와해되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불균형 때문에 그 균열이 시작된다(이 경우 가장 많이 듣는 하소연은 “일은 내가 다 하는데…”이다). 앞서 말한 경우처럼 팀을 이룬 개개인이 스스로 온전이 대표가 되고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1+1=2를 넘어 3,4가 될 수 있지만, 1+0.5=1.5가 되기는커녕, 0.5도 채 안 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물론 모두가 서로에게 완벽하고 완전한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각자 개개인이 충분한 실력을 쌓아야 하고, 서로에게 기대하기보다 서로를 돕고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팀을 꾸려가야 한다. 사안에 따라 언제든 상대의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하고,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 되는 일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처음에는 누구나 혼자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혼자서 벅찰 때가 반드시 온다. 그리고 그때를 어떻게 지혜롭게 넘어가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미래가 좌우된다. 그냥 소박하게 현실에 만족하며 혼자 어떻게든 끌고 나갈 수 있다. 나 하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일을 나눌 수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작은 동네 슈퍼마켓도 잠시 가게를 봐줄 사람이 없으면 밥 한 끼 챙겨 먹기 어렵고, 가게를 비우고 화장실 다녀오기도 쉽지 않다. 디자인도 결국 먹고사는 일이다. 재즈가 흐르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여유 있고 한가하게만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을 하는 두 사람 이상이 같이 하던지, 아니면 한 사람이 하더라도 혼자 두 세 사람의 몫을 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혼자 외롭고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디자이너라면 더더욱.



가장 이상적인 디자인 듀오 MYKC,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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