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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싸 Sep 07. 2023

좋은 게 좋은 거죠

(프로다움이 신뢰의 기본이에요)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면, 지인이나 지인의 소개 등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우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지인이니까’, ‘지인의 소개니까’ 등의 이유로 약간은 느슨한 계약(도 아니고, 그냥 구두 협의?)을 통해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를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견적을 정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마치 자신의 일인 냥 시간과 정성을 다해서 올인해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다르고, 클라이언트와 작업자로 역할이 정해진 경우의 마음은 특히 아주 많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일로 안 엮이는 편이 좋다는 말도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어떤 사례를 예로 들까 고민했다. 내 삶을 되돌아보니,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일부터 덥석 시작했다가 그쪽의 사정으로 끝없이 수정되다가 결국은 아예 없었던 일이 되었던 경우도 있었고(로고를 다 만들었는데 상호를 아예 바꾼다던지), 가격을 협의 안 하고 시작했다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굳이 이걸 받으려고 하는 것도 참 대단하네요’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걸하듯 받고 허탈해했던 경험도 있다. 지분을 줄 테니 개업준비를 도와달라는 말에 의기투합해 다니던 직장까지 때려치우고(내가 미쳤지 진짜) 월급 없이 몇 달을 버티며 아내의 눈치를 보던 일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돈을 떼인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그런 경험이 많다는 건,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결국 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나는 위에 열거한 나의 경험들이 오지랖을 빙자한 어리석음이 가져다준 극단적인 예이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앞으로 그런 비슷한 상황을 겪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때는 2012년 초, 결혼식을 두 달 정도 앞둔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은사님의 도움으로 만화에 관련된 전시와 브랜딩 작업을 몇 건 진행한 이력이 있어, 관련된 일들을 여러 건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개를 통해 대형 만화 행사에 사용될 몇 가지 디자인 작업을 ‘급하게’ 진행하게 되었다. 그 행사는 서울 DDP를 장소로 해서 많은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대형 행사였는데, 나는 그 행사에 사용될 전시 도록과 연구집 등 출판물을 몇 가지 만들게 되었다.

 시간도 촉박하고 작업양도 많아서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상황 앞에서 고민은 사치였다. 결혼식 후 신혼집은 당시에 내가 사무실 겸 집으로 쓰던 7평짜리 월세 오피스텔에서 시작하기로 했지만, 가족의 도움 없이 결혼식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일을 받아놓고 고민을 하는 건 배부른 소리였다. 더군다나 그 일을 소개해주신 분은 그 이전에도 몇 차례 일을 같이 했고 이 행사에도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그분에 대한 신뢰로 이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일은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었다. 함께 소통하던 담당자와도 손발이 잘 맞았고 나의 디자인 시안들도 별 무리 없이 오케이가 떨어져서 쭉쭉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디자인이 마무리된 도록, 연구집 등의 책자와 여러 인쇄물들도 나에게 속속 도착하면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잘 진행되고 있음에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냥 조금 불안했던 건 너무 급하게 시작해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과 약속된 작업비 지급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


 그 일들의 데드라인과 결혼식 준비가 같이 겹치면서 정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결혼식 하려고 일하다가 결혼식 전에 죽으면 어떡하지 싶은 불안함이 있었지만, 나만 믿고 함께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갔다가 도착할 즈음에는 디자인 비용을 꼭 입금하겠다는 담당자의 약속을 믿고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신혼여행 장소에 현지 시간 오전에 도착했는데 나는 그동안 쌓인 피로로 하루종일 잠만 자고 나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나의 아내는 옆에서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신혼여행의 첫날을 보냈다. 저녁에 겨우 일어나긴 했지만 계속된 피로로 입안엔 입병이 가득해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좀비처럼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이튿날부터는 힘을 내서 신혼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이제 곧 디자인 비용이 입금이 되겠지? 그러면 결혼식 준비로 긁은 카드값도 결제가 가능할 거야.’ 나는 지극히 당연한 계산을 어쩐지 불안하게 하며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담당자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행사가 무참히 망했고 자신을 비롯한 실무자들 모두 급여도 못 받을 상황이며, 여기저기서 소송이 준비 중이라고.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리하며 공들여 진행한 일이었다. 내가 받아야 할 수백만 원의 디자인비를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내게 그 일을 소개해 준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분 역시 이 일을 위해 많은 집필 작업을 했는데 자신도 한 푼의 원고료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며 억울해했다.


 나는 백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열심히 일하면 당연히 돈을 받는 지극히 상식적인 구조에만 익숙했고, 소송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 어떻게 결론 날지 모르는 일보다 당장 일을 해서 급한 불을 끄는 것이 먼저였다. 다른 일들을 진행하면서 짬짬이 여기저기 연락도 취해보고 할 수 있는 조치들도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그 행사를 진행한 대표와 어찌어찌 통화가 되었는데, 이렇게 되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결제해야 할 큰 건들부터 개인대출로 막고 있다, 내 문제도 순차적으로 해결해 주겠다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니 차후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그 후에는 아예 통화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무언가 더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계약서를 제대로 쓰지 않고 진행한 일의 비극에 대해 절절하게 배운 수업료로 치기로 했다(계약서가 없었기에 근거자료가 충분치 않아서 소액청구소송도 진행할 수 없다는 컨설팅을 받았다). 펑크 난 돈을 메우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그 대표는 이후로 몇 년간 소식을 들을 수 없다가 몇 년 후 다시 ‘문화기획자’라는 타이틀로 이런저런 행사를 기획하는 듯했는데, 아직도 이를 갈며 소식을 찾아보는 내가 한심해서 그만 관심을 끊기로 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이후로도 나는 [소개 > 급히 진행 > 계약서 미작성 > 돈 떼임]의 나만의 정형화된 프로세스를 몇 차례 더 겪은 뒤 사람도 잃고 시간도 잃고 건강도 잃고 결국은 애꿎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원망하며 디자인을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디자인을 몇 년간 그만두기도 했었다.


 디자인은 누구나 잘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굳어버린 프로보다 말랑말랑한 아마추어가 신선한 감각으로 훨씬 좋은 결과물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가 프로답게 보이는 건, 의외로 디자인 외의 것들이다. 정확한 내용이 들어간 계약서, 시안을 담아 보여주는 양식, 주고받는 메시지의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투. 이런 것들이다.


 아는 사람이니까, 믿음과 신뢰로? 그 사람에게 돈을 받을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하지만 단돈 만원이라도 받을 생각이 있다면, 정확하게, 있어 보이게 하는 습관을 들이고, 그 모양새를 만드는 데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 계약서를 만들어서 내밀어 보라. 계약서라는 것이 거창한 게 아니고, 인터넷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디자인 외주 표준계약서 양식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납기일정과 대금 지급에 관한 상황을 협의하여 기재한 뒤, 서명하고 서로 한 장씩 나누어 가지면 그뿐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계약서 한 장에 신뢰를 갖고, 당신이 이 일에 얼마나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지를 보여줄 것이다. ‘에이, 뭘 이 정도 일에 이런 것까지…’라고 하며 계약서 작성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에게 진지하게 일을 의뢰하고, 정확하게 결제를 할 마음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당신의 그런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더 안심하고 당신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일을 맡겨서 결과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까 봐 불안한 건 그쪽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불편함과 부담을 감수해 보자. 그것이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우리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지켜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을 안정적으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든든한 보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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