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드 오어 다이, 도망치는 레즈비언들

히로키 류이치 감독. 라이드 오어 다이

by 백승권



레이(미즈하라 키코)는 전문 킬러가 아니다. 의사다. 그래서 칼을 잘 다루는 걸까. 레이가 준비한 칼과 깨진 유리는 처음 만난 남자의 혈관을 단숨에 가른다. 피가 솟구쳐 레이의 온몸을 뒤덮는다. 레이는 그대로 겉옷을 걸치고 밤거리로 나온다. 빨간색 BMW 컨버터블이 멈춘다. 레이는 그 차에 동승한다. 운전석엔 나나에(호아 이오카)가 앉아 있었다. 의뢰인이었다. 둘은 자유를 만끽하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고요한 도심을 가로지른다.


둘은 레즈비언 커플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은 그랬다. 둘은 마음을 육성으로 고백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각각 부자와 빈자의 집에서 태어나 자라며 부자와 빈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레이가 의사가 되는 동안 나나에는 육상 유망주의 꿈을 접고 매춘을 전전하다 싸이코한테 팔려가야 했다. 모든 가난한 삶이 나나에의 여정과 닮았을 리 없지만 때리는 애비와 집 나간 엄마 사이에서 나나에는 선택권이 너무 없었다. 타인의 애정과 인정이 평생에 각인되는 10대 시절, 나나에에게 레이는 각인된다. 나나에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휩싸인 레이는 나나에에게 구원을 제안하지만 가진 건 자존심밖에 없던 나나에는 넌지시 거절한다. 레이의 생각대로 이어졌다면 둘은 부유한 20대 레즈비언 커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나나에는 부유한 미친 새끼의 폭력으로 온몸이 멍든 29살 성인 여성이 되어 있었다. 나나에는 10년 만에 레이에게 전화를 건다.


현재가 불안할수록 과거에 기대게 된다. 과거의 어느 한 때가 자신의 가장 완전한 순간이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워하게 된다. 나나에의 피폐해진 삶이 현실의 리에를 소환하고 있었다. 리에는 10년 만에 온 전화로 인해 단숨에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아마도 10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리에의 극단적 무리수였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구원하다는 명분은 옳았지만 리에는 다크 나이트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면 현장을 수습해줄 팀도 없었다. 리에는 도망쳐야 했다. 나나에의 마음을 얻게 되었을까. 자신의 부탁으로 남편을 죽이고 집안을 피칠갑으로 만든 사람을 다시 사랑하게 될까. 그게 사랑인가. 둘은 같이 도망치면서도 자신과 상대의 감정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다. 사랑? 동정? 살인교사와 살인범? 일단은 도망쳐야 했다. 달리기가 아닌 자동차와 바이크로.


불안과 공포가 현실감각을 잠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돌아갈 곳은 감옥, 또는 죽음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은 뜨겁고 행복했지만 금세 뒷맛 쓴 웃음기만 맴돌았다. 삶의 불행은 살인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주지 못했다. 자신들에겐 세기의 커플이겠지만 세상에겐 멍청한 레즈비언 살인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레이는 기대 이상의 부자라서 남은 모든 옵션이 절망은 아니다. 영화는 절규의 이별을 묘사하지만 법정과 감옥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레이가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린다면 레이와 나나에는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계획 살인을 저지른) 레이가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이게 (부유한 여성에게 관대했던 과거 케이스와 통념상) 설득된다면 레이는 여유롭게 다시 디올 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온다면 둘은 진정 처절한 도망자에서 열도를 뒤흔들 세기의 커플이 될 것이다. 레이의 전 여친이 둘을 가만히 놔둔다면.



keyword
이전 13화이지 걸, 샤넬백 선물해준 언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