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 후쿠오카
자신이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건 피곤하다. 믿고 의지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자기 생각과 달랐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틀렸다 나쁘다 이런 식으로 부정하면 처음엔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바로 비참한 굴욕감에 뒤덮인다. 그런 틀리고 나쁘게 여기고 싶은 상대를 잊지 못하고 보이지 않아도 매달리고 들리지 않아도 자꾸 부르며 무엇보다 모든 현실의 동력을 꺼두고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은 상대를 잊지 못하는 자신을 끔찍하도록 응시하게 된다. 자학하고 울고 되묻고 복기하고 실수를 체크하고 방해 요인을 찾고 시간을 잊고 시간을 세다가 아주 잠깐의 같이 있었던 시간을 박제시켜 버린다. 고리를 채우고 열쇠를 미지의 영역으로 던져버린다. 자신을 나올 수 없는 작은 상자에 가둔다. 그 안에서 발버둥 치며 괴로워한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어둠 속에서 홀로 대화를 한다. 절박함은 환영이 된다. 환영에게 가시적 이미지를 허용한다. 이미지가 말을 하고 걷고 만진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한다. 떠나자고 한다. 같이 후쿠오카로.
28년 만에 권해효 선배를 만난다. 보자마자 욕하고 꺼지라고 떠민다. 둘 다 동시에 순이를 좋아했고 그 여자가 자길 더 좋아한다고 각자 착각하고 있었고 그 여자가 갑자기 사라진 후 둘의 인생은 거기서 정지했다. 다음 챕터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긴 사는 데 살아있는 건지 살아있는 척하는 건지 죽었는데 모르는 건지 죽은 줄 아는 데 안 죽은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인척 한다. 살아있는 척들 하고 있다. 28년 전과 마찬가지로 기다리고 있다. 바뀌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멈춰서 기다리고만 있다. 그때의 자신을 좋아했다고 착각하며 그때에 멈춰서 썩어가고 있다. 처음 만난 나라의 헌책방에서 여자가 사는 도시의 술집에서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후쿠오카는 한국의 도시와 다른가. 떠나 올 가치가 있었나. 같이 온 박소담의 정체는 무엇인가. 40대 윤제문은 박소담이 10대 "또라이"인줄 알았는데 20대 "또라이"라서 선뜻 제안에 응했나. 오고 싶은 이유를 허구에 덧붙여 혼자 온건 아니었나. 박소담은 살아있나. 허구인가. 크게 거슬리지 않는 동행인, 가끔 도움이 되는 가이드, 같이 있으면 허전하지 않은 이성,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술친구,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고 가까이 있어도 딱히 분위기 미묘해지지 않는 먼 지인, 후쿠오카에 같이 온 박소담은 한국의 윤제문과 일본의 권해효를 연결한다. 싸우면서 같이 있고 욕하면서 술 마시고 같이 뛰고 같이 걷는다, 같은 방향으로. 한때는 정의되지 않는 것들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굳이 찾고 의미를 부여해가며 골몰했었다. 한국과 유럽에 오랫동안 구축하고 길들인 홍상수 유니버스의 일부 같은 기시감. 박소담의 대사들은 땅에 붙지 않는다. 권해효와 윤제문 역시 마찬가지다. 셋은 보이지 않는 사람과 지나간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고 그 사이 늙어버린 스스로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조금 의아하지만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은 일들을 지나며 들어봤지만 와보지 않았던 도시에서 셋과 다른 한 사람은 걷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꺼지지 않는 촛불을 분다. 갑자기 수년 만에 한국말을 하는 사람과 만난다. 연극에 몰입하려다 실패한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일관한다. 그래서 너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죽어있는 거야...라는 생각을 해봤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들 여긴 한국의 도시와 다르지 않다. 아무도 없고 누구도 모르며 유일하게 알았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40대 후반 남자 둘이 마주 앉아 계속 술 마시며 계속 옛날 여친 이야기를 하며 계속 싸우고 계속 떠든다. 외로웠겠지. 궁색하고 나른한 피사체들. 서가의 오래된 책들처럼 아무도 누구도 앞으로도 찾지 않을 것이다, 찾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