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곳, 청산가리에 대하여

김종관 감독. 아무도 없는 곳

by 백승권

가짜인 걸 아는데 뭘 믿어


도망친다. 견딜 수 없어서. 분열. 끝난 결혼.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내를 두고. 어떤 여자가 누군가를 향해 팔을 휘저으며 달려간다. 그곳엔 아무도 없다. 우연히 지인을 만난다. 지인(김상호)은 사진을 찍는다. 지인은 아내 이야기를 꺼낸다. 청산가리를 꺼낸다. 아픈 아내가 죽으면 자기도 죽을 거라며. 그러면서 그동안의 여정과 희망도 같이 꺼낸다. 전화가 울리고. 지인의 희망도 같이 울게 된다. 소설 쓰는 남자(연우진)는 시 쓰는 여자(이주영)를 만나고 거짓말을 한다. 시를 쓰는 여자는 떠난다. 그전에 소설 쓰는 남자는 오래된 커피숍에서 오래전에 죽은 아빠 이야기를 듣는다. 오래된 커피숍 안에는 나이 든 사람들이 각자 홀로 앉아 있다. 그들은 모두 말이 없고 뭔가에 골몰해 있다. 150살까지 살 게 아니라면 그들의 남은 날은 지나온 날보다 적다. 소설 쓰는 남자는 그들 중 한 명인 여성(문숙, 아이유)에게 지루한 이야기를 꺼내고 맺지 않는다. 공중전화 앞에서 망설이다 수화기를 천천히 든다. 건너편 목소리에 대고 그리움을 토로한다. 빈방에서 운다. 남자는 어쩌면 빈방에서 나오지 않고 내내 꿈만 꿨을지도 모른다. 결혼도 커피숍도 담배도 낮술도 밤술도 시 쓰는 여자도 공중전화도 보고 싶다는 말도 죽은 사람도 모두 꿈일지 모른다. 울고 있는 모습도 상상일지 모른다. 청산가리를 마시고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도망친 곳에서조차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지막 이야기로 남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청산가리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라지고 남은 세상은 그조차 사라진 아무도 없는 곳이 된다. 그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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