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어디 갔어 버나뎃
천재로 추앙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주변 작은 세계의 반응일 뿐,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원하지도 들뜨지도 않았다. 끔찍하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재밌어서 멈출 수 없는 건축 일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족도 기본 요건이 아니었다. 동반인은 정서적 안정감으로 보이지 않는 지탱을 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았다. 같이 살고 따스하고 사려 깊고 다정하지만 암묵적인 희생을 요구했다. 버나뎃은 커리어를 흔드는 사건을 겪었고 (남편이 원하는 대로)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의 회사(마이크로 소프트)가 가까운 동네로 이사한다. 엘진 역시 테크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버나뎃은 칩거 상태였다. 반복되는 유산과 아이의 심장 수술 과정을 지나며 젊고 찬란했던 천재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폐쇄적인 일상을 사는 이상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바깥의 타인들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다. 모든 쇼핑은 매번 가상 도우미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 해결했다. 불가항력으로 외출해야 했을 때, 버나뎃은 만성 불면의 후유증으로 공공장소에 아무렇게나 뻗어 있기도 했다. 엘진은 버나뎃과 재학 시절부터 함께했지만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어느 시점부터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전문 케어의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었다. 버나뎃과 사이가 나쁜 이웃이 차에 치이고 언덕이 폭우에 허물어져 토사가 이웃의 집을 매몰시켰을 때 엘진은 버나뎃을 유력한 용의자, 고의적 방관자로 보고 있었다. 버나뎃이 있어야 할 곳이 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신병원에 갇힐 거라는 공포에 휩싸인 버나뎃은 황급히 탈출한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가족들에게서. 목숨 같은 딸 비(엠마 넬슨)는 남극 여행을 원하고 있었고 버나뎃은 거기로 홀로 떠난다. 남극도 싫었지만, '언덕 위의 하얀 집'에 투옥될 순 없었다.
버나뎃의 증상을 검색하면 이름이 나오겠지만, 그보다 저런 면모를 지닌 복잡한 캐릭터에게 독립적인 서사를 부여한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일부 사람들은 조금씩 버나뎃스러운 면이 있다. 주변을 경계하고, 사람이 몰리는 곳을 꺼리며, 불면에 시달려 간혹 신경질 적이고, 잊지 못할 고통스러운 시간과 기억을 안고 있으며, 목숨처럼 사랑하는 존재가 있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빠져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면서도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우울감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며 좋으면 미쳐 날뛰기도 한다.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인물, 버나뎃은 천재라는 닉네임을 가진 허구가 아닌, 쉽게 드러나지 않는 거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그늘의 총합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을 극단적으로 단절시키거나 영웅화시키지 않고 딸을 통해 끝내 넘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이야기라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다. 나와 아내와 도로시를 겹쳤을 때 얼마나 다른가, 아니 얼마나 비슷한지. 나라는 까다로운 인물, 아내가 희생하고 감내하고 있는 시간들, 도로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또 오고 나서 지금까지 바꿔놓은 우리와 우리 사이의 수많은 것들, 가족은 레고 같은 똑같은 모양의 블록이 아니다. 개인이 지닌 개인적인 면을 가장 개인적으로 지켜줄 줄 아는 사람들과 살고 사랑하는 일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하다. 그게 가족이 아닐 때도 있지만, 가족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면 성공이라는 환상을 먼 곳에서 찾을 필요 없을 것이다. 삶은 영화가 아니지만 실시간을 잘 편집할 수 있다면 맘에 드는 영화와 비슷해질 수 있다. 현실의 행복은 고통과 희생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버나뎃이 남극까지 도달해서 고통과 시련을 각오하며 하고 싶은 일도 결국 과거의 복제일 뿐이다. 가장 맘에 드는 과거를 현재에서 다시 재생할 수 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 당사자는 행복이란 스티커를 기꺼이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