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비브스 감독. 니나의 모든 것
니나(메리 엘리자베스 원스티드)는 스탠딩 코미디를 한다. 자기 이름을 단 넷플릭스 쇼를 할 정도는 아니다. 하루 먹고살기 바쁘다. 성대모사를 수십 가지 연습해서 몇 가지 겨우 보여주기도 한다. 원나잇 같은 충동적 성관계를 자주 갖는다. 개인의 취향이자 라이프스타일이지만 이따금 커리어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를 니나의 상처와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서를 하나둘 흘린다. 다짜고짜 분노를 못 이기고 얼굴에 피멍을 만드는 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다. 끊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고 스스로 설득하려 애쓴다. 스탠딩 코미디의 소재로 쓰려고 메모하기도 한다. 그런 니나에게 엄마는 아무 말 못 한다. 아빠는 없다. 아빠는 니나의 세계에서 "자살"되었다. 간 쓸개 다 내놓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직업이지만 가족사는 금기의 소재다.
계속 만나고 싶은 남자가 생긴다. 둘은 말로 거리를 재다가 순식간에 몸을 좁힌다. 늘 그랬듯 단숨에 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프(커먼)는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을 감았던 모든 거미줄을 펼쳐 놓았다. 밤부터 아침까지 니나는 벗어날 길이 없다. 유부남, 바람둥이, 근사한 집, 엄청난 실력... 거짓말과 비거짓말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니나는 감긴다. 남자는 진심처럼 보였고 니나는 빠져드는 것 외에 옵션이 없었다. 그리고 원한다. 자신이 정한 고정관념에 맞게 레이프가 행동해주기를. 자신의 비상식적 행위에 무조건 편을 들어주고 적를 제압하는 기사가 되어주기를. 니나는 타인과의 감정 교류를 경계했다. 육체적 쾌락 외에 인간관계의 이점을 추구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과장된 어휘로 토크쇼를 한 후엔 늘 구토를 했다. 니나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지만 비인간적 대상을 사랑하며 방어와 결계를 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이프는 의외로 헌신적이었지만 인내는 빠르게 한계에 다다랐다. 니나는 균열을 회복하는 연인을 외계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부서질 줄만 알았지 다시 붙여놓을 수 없었다. 니나의 탓이 아니었다. 니나는 그런 감정 기능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혼란한 심정으로 지인의 업소에서 쇼를 한 날, 니나는 어두운 기억을 끄집어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올린다. 애비라는 인간이 자신에게 한 짓을 까발린다. 농담은 섞지 않는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 쇼는 망했지만 니나의 쇼는 이제 시작이었다. 껍질을 깬 이상 젖은 깃털을 말리고 굽은 날개를 펴면 그만이었다. 니나의 적나라한 솔직함은 그 자체로 스탠딩 코미디의 룰을 깬 엄청난 무기가 된다. 하지만 동시대의 기대감에 등 돌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타인의 불편한 진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였지만 회사의 수익원으로 삼고 대중의 지갑을 터는 건 다른 문제였다. 메이저 리그 입성을 앞뒀던 니나의 커리어는 곧바로 덜컥거린다. 하지만 어차피 늘 무대 위에서 혼자인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니나의 상처는 자주 소재로 오르내릴 것이다. 니나의 독설은 자산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니나는 회복할 것이다.
영화는 니나의 결핍을 조장한 가해자에게 징벌이 가해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니나의 내면에서는 자살 처리 되었지만 실제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끊임없이 공격 받았던 니나에게는 상식적인 아버지의 이미지가 없었고 다른 성인 남성에게서 대안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대신 불의에 맞서고, 자기를 보호하는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깊이 기댈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남성. 니나는 자신의 욕망이 자신과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조리한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가 이러한 여성 캐릭터에게 회복 서사를 구체적이고도 안정적으로 균형감 있게 보여줬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도발과 선언으로 전환점을 맞기는 했지만 저런 상처가 그저 피해자의 과감한 시도를 통해 스스로 극복해나가야 하는 문제로만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처절한 현실에는 저 정도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숨죽이고 웅크리고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권선징악은 현실의 룰은 아니지만 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아리 애스터의 유전 정도?)묘사되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많은 여성들에겐 용기와 잠재력이 있지만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과거를 다 털어놓으며 홀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