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이크 도레무스 감독. 조
인간에겐 결점이 있다. 결점 있는 인간들이 상상한 무결점의 신은 전제(결점이 만든 무결점)부터 글렀지만, 한없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상징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결점을 채울만한 대안이 필요했으니까. 임신과 출산부터 짐승과 다르다는 점을 찾아야 했다. 신이 태초 일주일 동안 마인크래프트처럼 만들었다는 세상의 자연적 구성 요소들 중에서 인간이 제대로 따라 만들 수 있는 건 여전히 거의 없다. 견딜 수 없었다. 신을 창조한 후 신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나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어. 짐승들처럼 짝짓기 행위를 거치지 않더라도 피조물을 생성할 수 있어. 흙으로 빚었다는 아담, 갈비뼈로 제작했다는 이브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어. 인간은 인간이 필요하지만 현재 인간은 현재 인간을 거부하니까. 새 인간, 미래형 인간을 만들자. 근데 왜. 외로우니까. 단지 외로워서? 인간은 외로워서 서로를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니까. 그럼 범죄 방지용으로? 아니, 만지고 싶으니까. 자기 자신을 만지고 싶으니까. 자신의 착각을 만지고 싶으니까. 자신의 불완전함, 허술한 기억, 자신을 긍정하고 싶은 믿음,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이한 우월감, 위로, 홀로 죽고 싶지 않으니까, 아니 잠시라도 눈을 마주 보고 싶어서. 나를 아무 공격성 없이 바라보는 눈, 나를 상처 입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 내가 주는 사랑을 거부하지 않을 선량함, 결국 나를 가장 사랑하는 또 하나의 나를 갖고 싶어서. 가장 동경하는 외모와 가장 그리운 과거와 가장 갖지 못한 감정이 간절해서. 평생 스스로 어쩌지 못한 결함을 외부 요인으로 채우고 싶어서. 그렇게 인간 콜(이완 맥그리거)은 비인간 조(레아 세두)를 조립하고 출시하고 망가지자 폐기했다. 마음에 들지 않자 외면했다. 인간이 창조한 신이 창조한 인간이 창조한 비인간의 최후였다.
비인간은 복제가 가능했다. (인간은) 신을 한정판으로 창조했지만 비인간은 쉬운 컨트롤을 위해 무한 복제를 가능하게 설정했다. 인간이 자신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인간을 만들듯, 인간은 비슷한 디자인의 비인간을 만들고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교육시킨 후 기능을 다하면 폐기했다. 학교를 마친 인간이 회사에 들어간 후 받는 대우와 비슷했다. 버려진 비인간이 갈 곳은 많지 않았다. 인간(또는 감독)의 상상력은 비인간을 (인간계에서 가장 바닥과 어둠을 상징하는 듯한) 성매매 업소로 데려다 놓는다. 문제는 비인간의 감정이었다. 감정은 비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중요 요소였다. 중요한 세일즈 포인트였고 신제품 비인간의 대화 및 스킨십을 통한 감정 유발 기능은 나날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비인간은 자신이 비인간임을 알고 있었고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며 인간과의 교류에 활용했다. 조는 달랐다. 초기 한정판 모델인 조는 자신이 비인간인 줄 몰랐다. 영화는 여기서 창조주의 손길을 당겨 피조물과 이어 붙인다. 서로 사랑에 빠진 피조물과 창조주는 서로의 훼손된 육체와 궁핍한 마음을 치유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결국 이어지고 만다. 닥치는 대로 아무와 쾌락적인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의 전부를 놓아버리려 했던 피조물은 끝내 창조주의 품에 안긴다. 오, 사랑. 인간의 무리에게 버려진 인간들이 혼탁한 분위기의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게 되고 인간 공학자에게 버려진 로봇은 같은 분위기의 성매매 업소에서 최후를 준비한다. 조의 최후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원받았다. 인간 남성 창조주는 이제 여성 로봇 피조물까지 구원한다. 결국엔 자신을 사랑하도록 길들일 거면서 자유의지는 무슨 소용인가. 자유의지를 프로그래밍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나. 로봇에게서 이성과의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그저 (커스터마이징 가능한)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인간의 결점은 결국 자기 결점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결국 그 안에 머물고 마는) 피조물을 생성하는 데 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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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서 비인간, 피조물, 로봇은 주로 조를 지칭하는 데 쓰였고, 인간, 창조주는 주로 콜을 지칭하는 데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