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럴드 퍼넬 감독. 프라미싱 영 우먼
리뷰를 며칠을 망설였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드물고 낯설다. 다이앤 크루거 주연의 심판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여러 면에서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해도 반박하기 어렵다. 남자들은 폭력을 쓴다. 경쟁에서 우위에 오르기 위해 상대를 거칠게 밀어낸다. 추악하고 더러운 방식도 서슴지 않는다. 과정에서 인지하지 못할 수 없다. 자신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것 또한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상대가 여성이라면 공격은 더 악랄해지기도 한다. 여성을 물리적 상대적 약자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약자로 인식한 상대가 자신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날 경우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력화시켜야 한다. 살인까지 세세하게 기획하진 않았더라도 결과가 상대의 죽음에 이른다면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는 결국 살해 의도의 시작과도 마찬가지다. 전 생애에 걸쳐 여성은 남성의 이런 폭력에 휩싸여 죽고 다친다. 생존자들(여성)은 평생을 웅크리며 살고 분노와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씻지 못한다.
친구를 잃고 카산드라의 인생도 같이 멈췄다. 카산드라(캐리 멀리건)의 긴 복수는 끔찍하지 않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가해자들 하나하나에겐 섬찟한 에피소드일 수 있지만 카산드라의 방식은 경고에 가까웠다. 카산드라는 훈련된 킬러가 아니었고 여성을 이름 없는 성욕 해소 대상으로 대하는 자들에게는 단지 불편한 하룻밤이었을 뿐이다. 의사는 원대한 꿈이었다. 능력이 충분했고 비전은 찬란했다. 그러다 함께했던 친구가 교내 집단 폭력의 대상이 되었고 생의 걸음을 멈췄다. 남성 가해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성폭력과 술, 웃음과 비명이 뒤섞여 있었다. 이후 카산드라는 정지된 삶 속에서 작은 복수들을 진행 중이었고 효과는 알길 없었다. 다만 한 명의 여성이라도 성욕에 미친 남성의 제물이 되는 걸 막아야 했다. 막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다,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희망, 누군가를 깊이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치유되는 시간들, 카산드라의 삶은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믿고 싶었다. 내 곁의 이 사람은 들개와 승냥이의 무리들과 다르기를. 제발 다르기를. 제발. 카산드라의 삶에 여성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은 없었다. 기대한 만큼 무너짐도 격렬했다. 카산드라에게 과거는 없었다. 과거는 여전히 현재였고 청산하지 못한다면 삶을 이어갈 가치도 없었다. 현재를 잘 살고 있는 과거의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이어가던 카산드라는 최후의 복수를 진행하기로 한다. 방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더 이상 아무 의미 없었다. 어느 누가 친구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나. 누가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나. 죽음을 짐처럼 떠안은 사람들과 죽음 속에서 살고 있는 카산드라 밖에 없었다. 카산드라는 전부를 걸어야 했다. 건장한 짐승들 사이에서 복수의 성공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생존이 목적이 아니었다. 목적은 처벌이었다.
연합한 남성 가해자들이 부와 권력의 갑옷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서 카산드라의 입지는 낮고 좁았다. 침묵의 피해자를 기억하는 현재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소박한 테러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주동자를 처벌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으니까.) 카산드라의 복수 목적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었다. 가해자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거였다. 이것만이 죽은 친구를 위한 최소한의 애도였다. 쉽게 망각하고 덮으려고 둘러대며 사과하지 않는 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는 할리우드 해피엔딩 같은 소리였다. 눈눈이이를 할 수 없다면 감은 눈을 찌르고 변명하는 이를 뽑아야 했다. 카산드라의 복수는 생존이 목적이 아니었다. 절박함에서 파생된 기발함이었고 놀라움이자 남은 자들을 향한 메시지였다. 용서도 망각도 없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