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뻐스데이, 행복이 가득한 집

이승원 감독. 해피뻐스데이

by 백승권

어떤 이들에게 가족이 가장 (가)족같은 이유는 자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 엉겨 붙어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여러 글에서 아무리 자주 언급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떼어내려 할수록 영영 떨어질 수 없다는 확인만 서늘하게 살갗과 장기를 관통할 뿐이다.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볼수록 비관적인 프레임으로 굳어져 좋을 게 있겠냐.. 굳이 그렇게 진지하게 저항할 필요 없이 그저 운명에 순응하라...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폐허가 재개발되어 프리미엄 블록이 되지 않는다. 폐허를 갈아엎으려 할수록 묻혀있던 핏덩이만 들추게 된다. 검은 형체의 점액질 괴물이 팔다리를 잡고 끌어당길 뿐이다. 허우적거릴수록 빨려 들어갈 뿐이다. 인식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과 진실 앞에서 가면을 쓰며 방어하는 건 필터를 덧입히려고 발광하는 건 소용없다. 과거가 지금 여기 이곳에서 숨 쉬고 있다. 나와 우리가 어디서 왔고 이렇게 만나 엉켜 나와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도륙하고 있음을, 눈 뜬 모든 낮과 눈 감은 모든 밤에 눈과 뼈에 칼로 새겨질 뿐이다. 바뀌지 않고 바꿀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 없고 앞으로는 더 최악의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어떤 이들에게 가족이란 그러하다. 그리고 이들을 가족이란 단어로 용접해준 생일이라는 날이 있다. 모인다. 다들. 욕설과 난투, 개 X랄을 떨어가며.


뭐랄까. 이걸 뭐라고 관전평을 적어야 할까. 더럽고 불쾌하며 불편하고 납득하기 힘들고 왜 저럴까? 보통 수많은 친인척들 중 하나 정도는 있다는 빌런(*장애를 지칭하는 게 아님) 캐릭터들이 한 공간에 가족이라며 다 모였다. 이들이 가족이라는 증거는 없다. 서로 다른 중력에서 살다가 엄마(서갑숙)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였고 엄마는 대부분의 사연과 진실을 알고 있으며 그 사연과 진실은 연민과 사랑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래도 서로를 향한 거친 액션 내면에는 온기가 있을 거잖아.. 그게 전 세계 공통으로 해당되는 가족이라는 속물들의 진심일 테니까... 같은 건 없다. 현실에도 없으니까 여기에는 더 없다. 생일을 축하하러 온 게 아니다. 다시는 생일 축하하지 않기 위해 모인 것이다. 생일 당사자의 마지막 생일을 치러주기 위해. 살인 공모자가 되기 위해. 혈연이 아닌 살인이라는 코드로 서로를 옭아매기 위해. 전문 범죄 집단이 아니다. 이들의 범죄는 탄생과 존재 자체다. 이들은 타인의 범죄로 가족이 된 자들이고 모여 범죄를 모의하며 흩어져 각자의 범죄를 저지른다. 숨 쉬는 내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한다. 죄의식이 없다. 의식도 없으니까.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약자를 처치하기로 하고 책임을 분담하기로 각서를 쓰고 실행한다. 엄마가 두목이 되고 나머지는 따른다. 짐승이 할 수 없는 짓을 인간들이 한다. 성범죄로 태어난 자들이 성범죄를 저지르고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성범죄자의 가족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열을 나누고 서로를 욕하고 때리고 살인을 진행한다. 죽어가는 자에게만 몰래 민낯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민낯은 순수하고 깨끗한가. 아니. 그들은 구원을 바라며 희생양을 내세운 게 아니다. 미래에 벌어질 살인을 현재로 끌어와 미리 저질렀을 뿐이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느닷없이 가족 호칭을 붙이고 가족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알고 보면 처음 본 타인보다 못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히 여기는 자는 오직 스스로일 뿐이다. 아무도 자기 외에 (가)족 같은 타인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정해지면 따를 뿐이다. 방향의 가치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 다들 자기 목구멍에만 밥숟가락 처넣기 바쁘다. 엄마는 잠시 큰소리로 운다. 마치 이렇게 하는 걸 어디서 본 것처럼 울다 만다. 아빠는 어딨나. 아빠는 없고 자식은 여럿이며 아빠는 하나가 아니다. 성욕에 미친 자들이 범죄를 저질러 가족을 이루고 성욕에 미친 수컷들로 가득 찬 집에서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살인이 진행된다. 갑자기 장면이 바뀐 뒤 집단 자살이 일어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가정은 말이 안 되지만 이런 가정이 없어도 말이 되는 게 없다. 엄마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약자의 성욕을 풀어주는 게 혈육으로서 진정한 마지막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노동자는 앞에서 존중받지만 뒤에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누가 누굴 혐오할 수 있나. (도덕적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 두는)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이들보다 더 낮은 지위가 있나. 이들이 누구를 더럽다고 비난할 수 있나.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향한 안구를 장착한 사람들은 없다. 사람들은 바깥을 본다. 타인을 더럽다고 힐난하면서 자신의 죄와 오물은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을 끊임없이 거부한다. 오물 투성이 속에서는 오물이 아무렇지 않다. 비교 우위가 없으니까. 이 가족이 그랬다. 각자 모두 더러워서 각자 자신의 더러움이 아무렇지 않았다. 면죄부가 있나. 아니 죄의 유무를 묻는 건 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이들은 다음 생일파티를 기획할 것이다. 다음 희생자를 검토할 것이다.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다른 한 명을 죽일 수 있다. 한번 죽여봤다면 또 한 번 죽일 수 있다. 가족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면 이들의 생성과 소멸을 되돌려보면 된다. 칼과 독은 순환하고 일정한 주기로 다시 돌아와 서로의 목과 위장을 자르고 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