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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14. 2024

감정 없음

끝을 앞두고 있다. 추상과 몽환의 끝이 아닌 실제 존재한 시공간의 끝. 과거의 이직들을 복기했지만 비교하기엔 너무 많이 달라 참고하기 어려웠다. 이번 이직은 또 다르고 새롭게 고요하다. 투명 냄비 속 끓는 물 같던 감정은 김을 걷힐 새도 없이 식고 사라졌다. 이번 단계의 마지막 과정을 지나는 만큼 이해는 가면서도 조금 의아했다. 코트의 외면을 두드려 먼지를 분리시키듯 털어도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상태.


감정을 돋아나게 하는 재료가 사라진 것 같았다.


주머니를 더듬어도 찾기 힘들었다. 잊거나 잃어버린 건가. 남아있지 않구나. 이미 다 태웠구나. 격랑에 휩쓸려갔거나. 보통 감정을 색연필로 사각형으로 그리면 선이 면이 되고 면이 모서리마다 붙어 입체가 되면서 그림자를 형성하고 하나의 오브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인지되곤 했었는데. 이번은 아니었다. 자의로 이번 공연 마지막 무대의 감흥을 느끼지 않기로 한 것보다는 느껴지지 않았다. 곳간과 창고가 텅 비어 밖으로 끄집어낼 자원도 장작도 없었다. 풍악을 울릴 밴드도 화려한 꽃다발도 시끄러운 박수소리도 부끄러운 헹가래도 없었다. 관객도 수군거림도 어색함도 희미했다.


아쉬움이 없다.


안도감으로 코팅이라도 되었는지 자각되는 감정의 온기가 없다. 그래서 꺼내어 쓸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혼란과 비극을 (형태를 파악할 길 없어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가장'한 구렁텅이 속에서 그럴듯한 단어를 길어 올려 곰팡이 핀 낡은 벽지 위에 더 낡은 벽지를 덧대어 바르며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을까. 이런 활동이라도 되어야 기록할만한 가치로 스스로 인정하는 꼴(모양새)은 (관객이 나 혼자라도) 얼마나 우스웠나. 외압과 내압의 완벽한 균형이 이뤄져 피부가 한쪽으로 패지 않는 상황일 거라고 암묵적 수긍을 하기로 했다. 긍정적 결과에 어쩔 줄 모르며 부동의 상태를 견지하는 것도 어쩌면 경험 부족과 미숙함, 익숙한 자학과 학습된 결핍의 일부일 수 있다. 매일의 모든 상태는 늘 최초이고 나는 늘 내가 낯설다. 탄생 과정에서 정신과 육체가 제대로 매칭되지 않아 각 파트의 존재 명분과 역할의 정당성을 늘 의심하게 되니까. 여섯 시간 후 마지막 출근한다. 4년이 지났고 다시 새로운 끝을 앞두고 있다.




*

상단 이미지는 YSL Libre(자유)

오랜 지인의 퇴사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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