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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03. 2024

나쁜 결말일까

23년 11월 2일~24년 3월 2일.


어디로 떨어질지 몰라 너무 무서워서 두렵고 어지러웠던 적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런 날들이 분명히 섬찟하게 날카롭게 폭력적으로 분초마다 할퀴고 있었다. 짓누르고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런 표현들이 과장이면 좋겠지만 위협은 가시적이었다. 방패를 준비하지 못해 온몸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고 투명망토가 없어 숨을 곳도 없었다. 어제의 공기와 달랐고 내일은 숨이나 쉴 수 있을지 언제 갑자기 내 이름을 호명하고 낯선 복도 사이로 끌고 가 단두대에 세울지 알 수 없었다. 막막했다. 무지는 불안이었다. 아니 이미 지옥의 전조이자 아마겟돈의 도래였다. 비상용 산소호흡기 같은 게 없어서 재료를 모아 하나하나 수공으로 만들어야 했다. 살아서 나가야지. 고문당한 시체가 되어 거적때기 덮인 수레에 실려 나가기 전에.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가야 했다. 이를 위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은 시간마저 알 수 없었다. 지구의 역사가 그랬듯 새로운 환경의 시작은 기존 것들의 멸망과 함께 찾아오곤 했으니까. 나는 기존 것들일까. 기존의 가엾은 값없는 것들에 속해 있을까. 피부를 갈아 끼운다고 하루아침에 새로운 것들이 될 순 없지. 아주 잠시 동안은 흉내 낼 순 있겠지. 아우슈비츠에 갇혀 대량학살 당한 포로들은 같은 포로들에게 이끌려 가스실로 향했다고 했다. 같은 포로를 가스실에 넣고 같은 포로의 시체를 가스실에서 꺼내고 같은 포로 시체가 사라진 가스실을 청소한 후 다시 같은 포로들을 데려와 가스실에 집어넣고 그러다 어느 날 자신도 그 가스실에 들어가고. 여기에서 죽을 순 없어. 하지만 당장 담장을 넘어 도망치다간 서치라이트에 발각되어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을 테니까.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같은 본보기가 될 테니까. 모든 날의 연속이 암흑은 아니었다. 말을 하고 일을 하고 책상을 치우고 내 임무를 잊지 않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움직이고 문을 열고 통로를 오가고 차를 타고 내리고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뭐든지 했다. 하나라도 놓치면 신호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너는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구나. 너는 지금 피해를 입히고 있구나. 너는 지금 온전치 않구나. 너는 지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구나. 너는 지금 우리와 모두에게 어떤 결함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구나. 그게 너의 망상이든 그게 너의 본질이든 너는 변수구나. 너는 예측하기 힘든 부정적인 면을 조금 보여줄 수 있구나. 조심해야 했다. 조심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 나는 다시 내가 원하는 근미래의 내가 되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진동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유의해야 했다. 최소한 삐걱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톱니바퀴가 되지는 말자. 호의를 왜곡하지 말자. 선의를 알아차리자. 도리를 하자. 최소한의 인간다운 역할을 이행하자. 배려를 그저 지나치지 말자. 칭찬을 아끼지 말자. 상대의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는지 애써 돋보이려 하지 말자. 마지막이 가장 중요했다. 장기자랑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송곳이 아닌 모두의 평온한 일부가 되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퍼즐 조각이 되어야 했다. 급진적인 의견은 넣어두자.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면 더더욱 유념하자. 파도가 잔잔하다면 굳이 그 위에 굉음의 모터보트로 거친 선을 그리려고 하지 말자. 내 안의 고요가 있다면 드러내자. 잊지 말자. 웅크리는 법을. 이번 겨울은 그런 겨울이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조립한 새로운 상자 안에서 몸을 구겨 넣으며 숨을 들이쉬고 내쉴 구석을 내내 찾아야 했던. 몸의 부피와 형태를 상자에 맞게 줄여야 할지 다시 바깥의 다른 상자를 구해야 할지 기대와 초조, 낙심과 심난이 쳇바퀴 속에서 돌고 돌았던. 나는 아직도 웅크린 등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이마를 바닥에 대고 내일 해야 할 말들을 떠올린다. 나쁜 결말일까.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IU 'Love wins all'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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