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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16. 2024

노비 강동원, 불타는 조선을 참수하다

박찬욱, 신철 각본. 김상만 감독. 전, 란

왕이 나라를 버렸다. 놀랍진 않다. 왕은 없지만 지금도 비슷하게 체감되어서. 왕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며 빗길에 엎어진 왕비를 비웃는다. 왕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며 먹을 게 없다며 투정한다. 왕이 버린 나라를 백성들이 싸워 되찾자 왕은 돌아와 궁궐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다시 짓자고 징징거린다. 먹을 게 없어 길바닥에 쓰러져 죽은 백성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궁궐을 짓기 위한 노동에 동원된다면 시체를 궁궐 모양으로 쌓는 일이 더 빠를 것 같았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면서 불타는 궁궐을 바라보며 왕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왕과 간신, 탐욕스러운 양반들만 활활 불탔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비 강동원은 운이 좋았다. 눈썰미가 좋은 덕에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운동신경 없는 양반 꼬마 때문에 대신 매 맞다가 숨이 멎을 수도 있었는데 매 맞으며 눈썰미로 검술을 숙지하니 양반 꼬마의 선생 역할로 격상될 수 있었다. 급기야 몸이 커서도 여전히 실력이 모자란 양반 자제 박정민 대신 대리시험을 쳐서 상급 공무원 자리를 꿰차게 해 주고 부상으로 왕이 하사한 검도 받아왔다. 이 정도면 가문의 위상을 바꾼 셈인데 금은보화는 아니어도 약조한 자유 정도는 주겠지. 평민이라도 될 수 있겠지. 노비 강동원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자는 보통 쓰레기가 아니었다. 개가 주인의 목숨을 구했다고 목줄을 풀어주는 양반이 아니었다. 노비 강동원은 도망간다. 지긋지긋했다. 검술 실력이라면 양반 가문 전체의 목을 베고도 남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노비 강동원은 악귀가 아니라 조선 백성을 불태우고 학살하는 왜군들을 베는 무사가 된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노비 강동원의 검술은 진화했다. 짧은 칼을 쓰는 법도 바로 익힐 수 있었다. 왜놈 장수 겐신(정성일)은 감탄한다. 싸움 잘하는 애들은 진짜 다른 싸움 잘하는 애들을 보면 왜 감동하고 꼭 1:1로 싸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노비 강동원과 겐신 정성일의 타이틀 매치가 기대되는 가운데 왕 차승원을 지키는 고위 공무원 박정민은 내내 억울하고 악만 받힌다. 고생 덜 해본 인간들은 잘못된 상황의 원인을 꼭 외부와 타인에게서 찾는다.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걸 보니 검술은 물론 책도 덜 읽었을 게 뻔하다. 누구 덕에 그 높은 자리에 오른 건데 은혜를 모르고 원수로 갚으려고 혈안이 된다. 식구들이 몰살된 후 모든 분노와 혐의를 노비 강동원에게 쏟는다. 한때 친구 비슷하게 여기기도 했는데 그거야 노비 강동원도 죽지 않으려고 가르쳐 준거고 박정민도 아빠가 시키는 대로 배우다 좀 친해진 정도다. 둘의 급조된 우정은 계급 사이에서 아무 힘이 없었다. 양반 가오를 무시했다고 분에 못 이겨 친구라는 인간 한쪽 손을 칼로 쑤시면 그게 친구인가. 넌 노비니까 난 너에게 그래도 돼 라는 인식이 뼛속 깊이 깔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결정이다. 강동원이 아픈 건 칼날이 뚫고 지나간 손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운명과 시스템을 어떻게 깨부수나 그 생각뿐이었다.   


혁명이 필요했다. 여유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왜놈들도 적이고 왕과 양반 놈들도 적이었다. 양반 놈들에게 도망쳐서 왜놈들을 물리쳐 나라를 구했더니 왕과 귀족들은 이 공로를 깡그리 무시하고 목을 베어 매달아 놓는다. 되려 왕과 귀족들은 왜놈들과 하나가 되어 백성들을 반역자라고 무참히 베고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뜻을 같이한 극소수 양반과 노비들은 이 과정에서 분열된다. 왜놈들이 대부분 물러가고 시국이 안정되는 듯 보이자 혁명의 분위기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양반들은 그동안의 우국충정을 인정받고 싶었다. 노비들에겐 어림없는 일이었다. 왕과 귀족들은 오히려 전쟁 때 공을 세운 자들이 추앙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릴 빼앗길까 봐. 겐신 정성일에겐 기회였다. 조선놈들은 역시 노답이네. 보물이나 챙겨서 한몫 잡고 뜨자. 노비 강동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패 죽일 놈은 너밖에 없다는 듯. 문제는 다른 쪽에서 공무원 박정민도 같이 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비 양반 왜놈이 뒤엉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해무 속에서.


전, 란은 최후에 누가 죽고 살아남는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도 초과의 진지함으로 빠지는 대신 각각 대가를 치르는 방식으로 마무리한다. 범동 김신록이 왕 차승원의 정수리를 격파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대신 영화는 새로운 여성 리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연대를 제안하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성은 어떤 시대에도 약한 적이 없었고 무리의 존속이 위협받는 극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든 패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범동 김신록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이제 조선의 새로운 미래는 잘생긴 무사와 강인한 여성 리더에게 맡겨졌다. 한국은 어떤가. 하염없이 불타오르는 한국에서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언제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백성들이 너무 많이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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