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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Nov 26. 2024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일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수입이 (지금보다) 적었더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수입이 적었을 때는 더 절박했다. 손에 쥔 게 작을 때는 의미에 더 매달렸다.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아니) 해야 하는 게 이거 밖에 없다고. (아니) 그랬나. 배우고 익힌 게 적은 어느 노동자의 소박한 자기변호에서 비롯되었나. 기능과 기술, 추상과 이념 사이에서 갈등했나. 매번 확인했나. 의심했나. 요구당했나. 변해야 한다고 압박했나. 지금보다 더 나아 보이는 지금과는 다를 것 같은 남들과 비슷한 선택이 결국 안전하고 안정적일 거라고 외운듯한 말들 사이에서 고민했나. 그게 지금이고 그래서 별로인가.


아니.


어떤 질문엔 단호하고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대답을 내려쓰기 위해 오래 고민한 것일수록 늘 대답은 있었지만 바깥으로 꺼내려고 오래 만진 것일수록. 아니. 다행히도 조금 더 쉬워 보이지만 더 길고 복잡한 불행으로 가려다가 나는 선택을 했다. 어디선가 본 적 없고 누구에게 물을 수 없고 결국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그림자를 이끌고 무거운 문을 열겠다고. 모든 과정을 감내하겠다고. 비장할 필요도 없었다. 중요하지만 어차피 내 여생의 주도권을 정하는 일이었으니까. 타인의 삶엔 관여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내게 무게가 실린 이런 결정은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이런 결정은 순전히 내 몫이니까. 핑계도 후회도 나중일이다. 불안과 공포를 서둘러 대출할 필요는 없다. 이런 배경이 더해져야 현재의 일에 대한 해석에 작은 힘이 실린다. 숨을 쉴 수 있을 때 글을 쓸 수 있을 때 낮게 깔린 진짜를 꺼내 널어놓을 수 있다. 가파른 상승과 공격적 확장이 유일한 목적이자 기준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세계 속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들로 대화와 침묵을 채우고 있다. 한때는 증명을 갈망하며 인정에 허덕였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줄여나가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12시간 지난 후 도착한 딕테(차학경)의 표지 뒷면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 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글을 쓸 수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 이 말을 이글에 쓰고 싶었는데. 이 말이 먼저 도착했다.


*이글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OPUS 앨범을 듣다가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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