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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05. 2016

작가란 무엇인가

파리 리뷰

‘작가’는 설레는 단어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고 염원한다.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 붙이지만, 애초 온전히 글 쓰는 이의 것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선생님이나 어르신과는 다른 고유의 전문성이 있었다. 나 역시 한때 저 말을 원했다. 작가가 이름 뒤에 붙는 순간, 급격한 계급의 변동이 이뤄질 것만 같아서였다. 사회적 존경과 그에 걸맞은 부유함이 따라올 것 같았다. ‘작가’는 그러했다. 신기루였다. 

먼저 글을 써야 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니까. A4에 커다랗게 적어 벽에 붙인 꿈의 이름은 아니었지만, 잘하고 싶고 되고 싶었던 모든 이미지의 총합이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는 점점 더 구체적인 그림이 되어갔다. 하지만 멀어지고 있었다. 쓰면 쓸수록 작가의 지위는 낮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알면 알아갈수록, 작가는 과거에 꿈꾸던 작가의 이미지와 달랐다. 작가는 성주가 아니었고, 권력자가 아니었으며, 세상을 뒤흔드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차라리 농부에 가까웠다.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며 매일같이 작물을 돌봐야 하는, 식물과 같은 운명을 지고 태어난 땅에서 발을 떼지 않아야 하는 이들처럼 보였다. 초월적 근면함과 세상과 부닥치며 생기는 거친 피부와 상처를 지닌 이들로 보였다. 존재하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들풀처럼,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작가들이 있으며, 이름 없는 이들의 글로 인해 이름 없는 다른 이들이 위로받고 있다는 것도 체감하게 되었다. 나도 그들의 글로 그러했으니까. 쓰는 중에는 감각하지 못하던 것들이 읽는 중에는 거센 풍랑처럼 몰려와 심연의 텅 빈 곳곳을 뒤덮었다. 읽고 쓰고 다시 읽고 다시 써가며 하나둘 익숙해져 가는 이름들이 생겨났다. 부족한 독서력으로 인해 이름을 처음 들은 시기와 그 이름이 맨 앞장에 적힌 책을 펼친 시기의 사이는 매우 길고 느렸다. 영화에서 다뤄 처음 알게 되었다가 빠져버린 작품들과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익숙한 이름이 늘어날수록 책장은 좁아져갔다. 손을 떠난 책들이 쌓여갈수록 만나고 싶은 작가들의 이름은 더 늘어만 갔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그 과정에서 만난 이름이었다. 

쓰기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만의 세계에 함몰되곤 한다. 한없이 작아진 체구와 무뎌진 손끝, 돌덩이가 되어버린 머리와 초점 없는 눈, 온전하지 못한 뼈마디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생존 부적격자 같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이들의 처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먼저 태어나 먼저 펜을 잡고, 먼저 세상을 경험한 뒤 먼저 읽고 쓰고 말하기 시작한 작가들이면 더더욱이나. 모든 것을 나보다 먼저 시작하고 어쩌면 내가 10번을 부활해도 이루기 어려울 위대한 성취의 지점에 이미 이른 작가들이기에. 이런 심정으로 펼치고 넘기고 줄을 쳤다. 고해하건대, 난 1, 2, 3권에 언급된 작가들과 작품들의 절반조차 읽지 않았다. 생소한 이름들도 많았다. 온통 발견하고 훔쳐 갈 것들 투성이었다. 눈을 뜬 새벽의 움직임부터 늦은 시간 잠들기 전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쓸어 담고 싶었다. 당신들은 어떠했나. 상상처럼, 신사의 옷차림으로 세상의 모든 고뇌를 종이 위에 쏟아붓는데 자신의 오장육부와 정신을 헌납했나. 어떠했나. 과연 나와 우리와 모두와 달랐나.     

움베르트 에코는 같은 페이지를 수십 번 다시 쓴다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를 쓰는 데 6개월을 보내고, 수정하는 데 6~7개월을 보낸다고 했다. 한 문단을 완성하는 데 어떤 때는 하루, 어떤 때는 반나절, 어떤 때는 한 시간, 어떤 때는 3일이 걸린다고도 했다. 필립 로스는 한편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3년 동안 하루 종일 글을 쓰고,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긴다고 했다. 헤밍웨이는 에이치비 연필 7자루를 뭉툭하게 만들면 하루 일로 충분하다고 했다. 오엔 겐자부로는 대개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열한 시까지 일한다고 하며, 자신의 주요한 문학적 방법 중 하나는 ‘차이를 가진 반복’이라 전했다. 스티븐 킹은 결혼 후 첫 몇 년 동안은 가족을 부양하려고 세탁소에서 모텔 침구를 세탁하거나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남성 잡지에 단편소설을 팔기도 했다고 했다. 앨리스 먼로는 서점 근무를 하며 집안일을 하고 글을 썼는데 서점에 매일 나가지 않게 되었을 때는 다들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기 전까지, 모두 다시 나간 다음 2시 반까지 글을 쓰고 커피를 한잔 마신 뒤 서둘러 집안일을 끝내야 했다고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낮잠 자는 틈을 활용해 쓴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 정도였다. 모자에서 비둘기가 사라지는 마술은 없었다. 엄청난 노동력에 삽입된 고통과 슬픔의 과정만 나열된 것은 아니었다. 작가들에겐 그 이상,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되었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보다 다채롭게 나열되었다. 움베르트 에코는 전적으로 모든 분야에 탐욕스러울 수는 없기에, 모든 걸 다 배우려고 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마르케스가 들었던 최고의 조언은, 젊을 때는 영감이 끝없이 솟구치고 있기 때문에 우연에 맡기는 방식으로 일해도 괜찮지만 소설 쓰는 기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영감이 사라지고 이를 보상할 수 있는 기법이 필요하게 되는 훗날에 곤경에 빠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는 서로의 창작을 존중함으로써, 서로를 깊이 연결하면서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문학을 명성과 권력을 얻는 방편으로 여길 때 자유롭거나 대담하거나 독창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문학이 복수한다고 했다. 트루먼 카포티는 모든 형태의 예술에서 가장 위대한 강렬함은 신중하고 부지런하고 차가운 머리로 얻어진다고 믿었다. 줄리언 반스가 생각하는 위대한 책의 조건이란 이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었고, 소설 쓰기는 전통적인 노동의 형태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 드릴로는 작가가 주변을 둘러싼 세력, 즉 길거리의 사람들과 그들의 압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필요한 건 종이에 적힘 단어들뿐이라고 여겼고, 언어에 몰두하며 운반자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문장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단어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지켜보면 감각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는 다시 볼 때, 세 번 볼 때 보이는 것들과 느껴지는 것들이 다르다. <작가란 무엇인가> 또한 그럴 것이다. 명성에 함몰되지 않고 곧고 초연하게 글과 삶을 일치시킨 이들의 증언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를 통해 오롯이 옮겨져 있었다. 쓴 책과 환경, 시대와 성격 모두 달랐지만, 그래서 더 유일하고 특별했으며 살아온 모습과 정신, 철학 모두 자기스러움을 놓지 않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잠재력이 고단한 반복과 남다르지 않은 환경 속에서 돋아나기 위한 무수한 여정들의 합. 그 수단도 과정도 결과도 결국 소설이라는 대표 문학 장르로 관통하고 있었다. 답한 이들만큼, 질문한 이들의 방대한 지성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작가에 대한 정의에 의문이 생길 때마다 느닷없이 펼칠 날이 오겠지. 그들 대부분 모두, 태어나 쓰다 죽었다. 자신에게 닥친 세상의 물음에 글이라는 무기로 평생을 걸쳐 답하며. 일부는 살아있고 여전히 다음 작품을 쓰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답할 수 있을까. 작가들은 여전히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물음이 시작된 근원과 이를 기록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작가가 죽어도 작품이 남듯, 그들의 대답은 지금도, 전 세계인의 눈과 시간을 부여잡으며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대답들로 인해 삶에 대한 명분과 미래에 대한 지혜를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작가들은 구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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