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Jul 12. 2018

종이 달, 행복의 가격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종이 달








대출 빚, 맞벌이, 무미건조한 은행 업무, 다정하지만 그뿐인 (설렘이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듯한) 남편, 몰래 저지르는 백화점 쇼핑의 쾌감. 당연하게도 가장 마지막 요소가 리카(미야자와 리에)의 잠들어 있던 스위치를 켠다. 과시적인 의욕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묵묵한 성실함으로 실적을 올리던 중 부유한 고객의 손자인 코타(이케마츠 소스케)와 하룻밤을 보낸다. 대학생 코타는 사채빚이 있었고 연민에 휩싸인 리카는 도울 방법을 간구하던 중 고객의 돈을 빼돌리기로 한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때부터 리카는 남의 돈으로 훔친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허영의 불꽃.


사소한 것 하나까지 감시받는 업무, 리카의 수법은 교묘해진다. 연하 애인을 도와주려고 시작했던 고객 예금 횡령은 데이트 자금과 명품 구매 등으로 스케일이 커진다. 지점 방문이 어려운 고객들의 집을 매번 직접 방문하던 배려는 그들의 돈을 더욱 쉽게 훔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꼬리가 길어졌을 때 밟힐 뻔했고 타인의 약점을 더욱 거세게 압박하며 위기에서 벗어난다. 리카는 3박 4일에 1500만 원에 달하는 호텔에서 마시고 즐기며 도피와 쾌락의 정점을 경험한다. 회사에서 유리한 기회를 얻어 전근 가게 된 남편의 요청마저 거절한다. 어떤 수단으로 거머쥐었든 지금 이 행복을 멈출 수 없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식사를 하고, 갑갑한 지하철이나 자전거 대신 BMW를 타고 도로를 누리는 쾌감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리카는 이미 장비와 실력을 지닌 전문 위조범이었고 여느 사기꾼처럼 좋은 정보과 조건에 솔깃하는 고객의 심리와 무지를 한껏 이용했다.


그러다 완전히 걸렸다.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은 스미(고바야시 사토미)의 레이더에 리카의 은근히 달라진 면은 의심을 받기 충분했다. 흥청망청 함께 유흥을 즐기던 연하 애인 놈은 자신과 뒹굴던 침대에서 어린 여자와 발가벗고 누워 있었다. 황홀하다 여겼던 순간순간이 파지가 되어 낱낱이 파쇄되고 있었다. 한 푼이라도 되돌려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너무 늦었다. 저는 은행원인데 3천만 엔만 사채를 쓸 수 있을까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추궁하는 상급자에게 모두 털어놔야 했고 비참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몰래 빼 생계가 어려운 외국 소년에게 기부했던 기억이 내내 맴돌았다. 리카는 그때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채, 리카는 끊임없이 돈을 기부하며 만족했다. 그게 자신의 돈으로 행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거부당했을 때 리카는 당황했다. 그때부터 리카는 이미 결과가 괜찮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쉽게 저지를 수 없는 일, 범죄의 속성. 스미는 같은 은행원으로서 고객들의 거액을 횡령한 리카의 행동에 감탄한다. 무표정으로 흥분을 숨겼지만 자신은 절대로 손끝도 꿈틀거리지 못할 엄청난 일탈이었다. 매일 마주치던 리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걸 해냈고 자신은 여전히 틀 안에 갇힌 이제는 직장에서 쫓겨날 일만 남은 퇴물이었다. 리카는 자신의 일탈에 마지노선을 두지 않았다. 걸린 건 안타까웠고 잠시 가짜가 되어 누린 쾌감의 뒷맛은 지독했다. 이대로 감옥에 가야 하나. 영영 갇힌 채 후회만 하면서? 리카는 의자를 집어던져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린다. 온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달아났고 등 뒤로 수많은 미련들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범죄의 쾌감은 비현실성에서 온다. 고객의 거액을 훔치지 않았다면 리카는 두 번 다시 삶에서 같은 쾌락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학생 애인의 등록금 빚을 갚아주거나 매킨토시를 사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배반을 경험해야 했지만 적어도 리카의 주도적인 선택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리카는 범죄라는 치트키를 썼지만 그전까지는 없었던 자기 삶을 살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회상은 체포된 후 감옥 안에서 할 수 있겠지. 언제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은행원,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애인, 누군가의 고객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의 리카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타인의 예금을 훔치지 않고 가능할까. 타인의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성취한다고 하여 그게 거짓과 가짜의 행복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리카는 선을 넘어 저지른 자였고 다수가 입만 살아 나불대는 '진짜'를 경험한 극소수였다. 누군가를 배반하고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며 리카는 자신만의 달 위에 착륙했다.  



이전 27화 마녀, 나를 찾아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