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말 한마디로 두 국가를 전쟁의 불길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 디저트 조각 케이크를 포크로 콕 찍어 입 안에 집어넣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왕. 먹고 놀고 자고 다시 일어나 먹고 놀고 잔다. 보고도 받고 중요한 내용은 공표도 한다. 하지만 한없이 귀찮은 일 중 하나다. 무엇보다 국정 운영 능력이 제로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응석 받이 영국 여왕 앤(올리비아 콜먼). 그녀가 여왕의 지위를 누리는 이유는 모두가 그녀를 여왕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사라(레이첼 와이즈). 남편(마크 거티스)을 전장의 중심으로 보낸 사라에게 여왕 앤의 한마디 한마디는 남편의 생사에 치명적이다. 사라는 앤을 조종한다. 여왕을 조종한다. 권력을 장악한다. 실질적으로 영국을 움직인다. 갓난아이 같은 여왕 앤에게 사라는 엄마이자 보모이며 선생, 그리고 모든 결정을 대신 맡길 수 있는 베프이자 잠자리 상대였다. 사라는 그런 자신의 지위를 잘 알았고 잃지 않으려 섬세하게 관리한다. 사라야말로 앤을 등에 업은 절대 권력자였다. 애비게일(엠마 스톤)이 나타나기 전까지 영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밀려 떨어져 진흙투성이 몰골을 한 하녀, 애비게일은 몰락한 귀족의 처절한 현재였다. 애비에 의해 팔려갔고 매음굴을 전전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남아 영국 왕실까지 기어들어 왔다. 사라에겐 낯선 등장이었지만 경계는 없었다. 하녀는 하녀니까. 하지만 애비게일은 사라와 앤과 다른 여정을 지나온 캐릭터였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법에 능숙했다.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빨리 파악하고 방해가 된다면 제거한다. 애비게일의 원칙은 명확했다. 여왕 앤에게 접근한다. 사라의 자리를 위협한다. 사라는 점점 뒤로 밀리고 앤과 애비게일의 거리는 좁혀진다. 어느새 앤의 이불속엔 애비게일이 있었다. 사라는 독을 먹고 말에서 떨어진다. 밤마다 열리는 화려한 파티, 영국 왕실은 애비게일의 차지가 된다.
앤은 즐기고 있었다. 사라와 애비게일이 자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왕의 말 한마디면 누구라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사라는 집요했고 애비게일은 영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앤은 양쪽의 질투심으로 자신의 상실감이 채워지는 짜릿함이 너무 좋았다. 상실감. 열일곱 명의 아이를 잃은 상실감. 사산, 유산, 이른 죽음으로 열일곱의 핏덩이가 곁을 떠났다. 영혼이 육체가 열일곱 아니 수천 조각으로 찢어졌다. 앤의 지위만큼이나 (부정적인 의미로) 고통 역시 특별했다. 열일곱 마리의 아기오리에게 각각의 이름과 특성을 부여한다. 아기오리는 아마도 지금은 없는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하지만 괜찮다고 착각할 수 있는 서글픈 대체 생명체. 이런 앤에게 영국이, 왕실이, 양당의 대립이, 자신의 권력을 노리는 두 여자의 감정이 뭐가 중요할까. 스스로 죽을 자신이 없어 죽은 듯이 살았다. 시끄럽고 괴기스러우며 아둔하고 신경질적으로, 스스로를 방치했다. 여왕이라는 지위는 편리했다. 아무도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감히 묻지 않았고 그래서 어떤 변명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사라를 오랫동안 의지했지만, 갑자기 나타나 비위를 맞추는 애비게일도 나쁘지 않았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아이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삶, 내가 나를 버려도 주변에서 나를 챙겨주는 기분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여왕 앤은 아이였다.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대신해 그녀는 엄마가 아닌 아이가 되었다.
사라 VS 애비게일, 빼앗겨 본 적 없는 사라는 한번 빼앗은 것을 잃지 않으려는데 익숙한 애비게일보다 약했다. 사라가 오랫동안 무기로 갈고닦아 온 강력한 카리스마와 탄탄하다 믿었던 유대관계는 간교한 애비게일의 교태 앞에서 완전히 붕괴된다. 자존심만 손상된 게 아니었다. 부와 권력이 송두리째 날아간다. 사라는 회심의 크로스카운터를 노리고 있었지만 링 밖으로 날아가 산산조각 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압송될 것이다. 사라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애초 여왕의 곁에 안전한 자리는 없었다. 그럼 애비게일은 모든 과거를 씻고 권력의 단맛에 심취하며 여생을 보내는가? 겨우 여왕 앤의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는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을 뿐이다. 앤이 느닷없이 죽더라도 여왕의 권력은 애비게일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여왕 옆자리 빼앗기 게임에서 겨우 이긴 승자일 뿐, 평등할 수 없는 지위와 종속된 삶의 본질은 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