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병에 걸린 자녀를 치료하는 방법

조엘 에저튼 감독. 보이 이레이즈드

by 백승권

동성애는 사랑이다. 개인의 감정 문제라는 테두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넘었다. 존재 자체로 상징이다. 동성애를 한다는 자체가 주류를 거부하고 사회에 저항한다는 메시지처럼 과대 해석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은 변화를 동반하지만 동성애의 경우 여파가 엄청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범죄처럼 다뤄지고 있다. 범죄자에게 처벌과 교화의 시간이 필요하듯 동성애자들에게도 같은 게 요구된다. 동성애 전환시설이라니. 조엘 에저튼이 연출한 보이 이레이즈드의 장르는 중세 판타지가 아니다.


한없이 사려 깊고 헌신적인 엄마 낸시(니콜 키드먼)와 보수적인 교회 목사인 아빠 마샬(러셀 크로우)을 둔 자레드(루카스 헤지스)는 동성애 전환시설에 강제 등록된다. 출처가 불명확한 -아들을 동성애+범죄자라고 주장하는- 전화를 받은 마샬은 아들의 증세를 기도로 치유하려고 시도하고, 결국 전환시설에 넣기로 결정한다. 어떤 저지도 할 수 없었던, 낸시는 시설까지 자레드를 바래다준다. 자레드는 달리는 차창 밖으로 팔을 뻗어 휘젓는다. 하지 마. 낸시는 경계한다. 하지만 자레드는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듣지 못한다. 위험하니까. 그건 거짓말이잖아. 아냐 전에 누가 팔이 날아갔다고 했어. 자레드는 다시 팔을 넣는다. 전환시설에 들어간다.


다양한 사연을 지녔을 자레드와 비슷한 10대 소년들로 시설은 가득하다. 삼엄하고도 차분한 분위기, 무표정과 경계의 눈빛으로 가득한 직원들, 그리고 각자의 불안함을 끌어안고 있는, 동성애를 치유 대상으로 판정받은 10대들. 빅터(조엘 에저튼)는 그곳에서 그들을 교정하는 시설 대표다. 10대들 대상으로 동성애 교정을 목적으로 한 시설의 대표. 아이고 우리 애가 동성애라니, 애끓는 부모들이 자식들 멱살 잡고 와 집어넣은 곳의 대표의 말과 행동은 어느 하나 논리적이지도 않고 치유와도 거리가 매우 멀어 보인다. 강렬한 어조뿐인 허황된 연설과 폭압적인 태도, 서로의 교류를 막는 규율과 외부로 통하는 개인 소지품 압수, 부모와 절대 공유하지 않는 교육 내용과 출신이 불명확한 직원들, 전과자 교사와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는 과정까지. 그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건 교정이 아닌 '나는 더 이상 동성애자가 아니다'라는 허위 자백이다. 비싼 돈을 치른 부모들을 안심시킬만한.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동성애는 전염병이나 정신병이 아니라는 걸, 교정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아이들은 점점 고립된 환경에서 끊임없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겪으며 더욱 피폐해진 다는 걸. 오직 거짓말과 연기력만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은 부모가 원한다는 이유로 하루하루를 무력감으로 견딘다. 자레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경험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찾아왔으며 계속 이어지고 강제로 부정하려고 해도 절대 교정될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고민 끝에 탈출을 시도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낸시는 악몽 같은 시설에서 아들을 구해낸다. 교정기간이 지속되었다면, 자레드는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레드의 탈출을 도왔던 친구가 그렇게 되었듯이.


낸시는 자레드에게 눈물 흘리며 사과한다.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처음부터 알면서도 자신은 엄마였음에도 제대로 말리지 못했다고. 이 사실이 사는 내내 괴롭힐 거라고. 정말 미안하다고. 낸시는 지옥으로 처넣는 데 동의하고 설득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었다. 목사 남편을 둔 여자로서 낸시는 중간자였고 아들의 불안한 눈빛을 알았음에도 한없는 불확실성에 내동댕이쳤다. 그 결과 자레드는 한동안 극심히 고통스러웠고 자신이 진짜 비정상인지 나는 정말 교정되어야 하는 건지 수많은 번민에 휩싸여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작점이자 중심축에 목사이자 아버지, 시설로 밀어 넣은 장본인 마샬이 있었다.


마샬은 평생을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며 산 자로서 '동성애'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시설을 나온 아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아들의 경험이 유력한 시사지에 기사로 게재되었을 때조차 그는 진실과 마주하기를 거부했다. 자레드는 아버지에게 사과받고 싶었지만, 마샬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가능한 게 사랑이지만, 이 경우 그는 보호자의 지위로써 사랑을 권력으로 남용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레드는 자신을 증오하며 고통받아야 했다. 화해는 가능할까. 마샬이 자레드를 동성애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자신이 평생 따른 신념을 배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들보다 신의 편이 편했고 이것은 결국 변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였다. 동성애자 아들은 목사의 권위와 신의 말씀에서 너무 먼 반대편에 있었다. 이해보다 배척이 쉬웠다.


보이 이레이즈드는 자레드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을 통해 미국 내 동성애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무겁고 서늘하게 보여준다. 10대 동성애 전환시설과 목사 가정의 내부를 오가며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여전히 긴밀한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고발한다. 기성세대의 보수적 사고관과 권위의식, 몰이해와 무식한 해결 방식이 얼마나 많은 10대 동성애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지 증언한다. 이것이 단순 해프닝이 아닌 얼마나 많은 이들의 잘못된 연대로 끈끈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사랑과 폭력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단어인지 10대들의 서글픈 눈빛과 부모세대의 무책임한 선택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무지는 돌파하기보다 두려워하는 게 쉽다. 웅크린 삶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없다. 누군가는 달리는 차창밖으로 팔을 뻗으며 빠르게 부는 바람을 피부로 직접 느끼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진정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저러다가 팔이 잘릴 거라는 걱정은 팔의 주인을 위한 진심보다는 잘리는 장면을 감당할 수 없을 자신을 위한 회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이 부분은 부모 입장에 이입하면 이해의 여지가 있다) 인간은 자라며 스스로를 책임질 자격을 획득한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소녀소년들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기독교의 신이 동성애 혐오자였다면 굳이 인간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리며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과 희생을 감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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