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 돌란 감독. 로렌스 애니웨이
인간이 인간을 좋아한다.
동물이 동물을 좋아한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어떤 여자는
자신은 처음부터 여자였다고 고백한
남자 친구를 좋아하기로 한다.
어느 날 자신이 사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라고 고백한
남자 친구를 좋아하기로 한다.
떠나지 않기로 한다.
그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해하고 걱정하며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사랑을 체온을 위로를
가장 가까이에서 감싸 안으며 전해주기로 한다.
결국 사랑도 사람도 관계도
지치기 마련이다.
끊임없는 불안과 충동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격렬하게 표출하고
주워 담지 못한다.
로렌스와 프레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그린
아무르(2012)의 연인처럼 서로를
늙어 죽도록 사랑하지 않는다.
수많은 장면과 대사가 기억에 많이 사라져
잔상으로 남아 있는 걸 꺼내보면
그들은 서로를 상처주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상대의 한계를 사랑하는 과정이
주어진 세계의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문학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연민 섞인 조롱을
들어야 하는 일이다. 짙은 화장과
어색한 핏의 치마와 구두를 차려입은
여자를 선언한 건장한 체구의 남자 친구와 있는 건,
많은 체념 속에서 최악은 아니라 여겼던
과거의 세상과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일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속에서 계속
이길 수 없어가며 이어가는 삶이라면
포기와 불가능은 비겁한 선택이 아니다.
건강과 안정, 생존을 위해 권장되는 일이다.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헤어졌고 다시 만났지만
다시 헤어졌다.
적어도 한 사람은 다른 성별을 선택하며
익숙한 이성/동성 커플과는 다른 외형을 띄었지만
그들이 처음 서로에게 끌린 이유와
그들이 마지막으로 싸운 이유는
다른 커플과 다르지 않았다.
거기까지였다.
거기까지만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