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이리시맨의 평범한 인생

마틴 스콜세지 감독. 아이리시맨

by 백승권

프랭크(로버트 드니로)는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남자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모두 무조건 총을 잘 다루거나 범죄에 거부감이 없거나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건 아니겠지만 프랭크는 셋 다 잘한다. 겉으로는 로버트 드니로 닮은 허허실실 아저씨인데 총 뽑는 일엔 장난 없다. 의뢰받은 목표물에 다가가고 총을 뽑아 원하는 신체 부위를 쏘고 확인 사살하고 현장을 벗어나고 총을 없애는데 능숙하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재능과 노력과 경험으로 숙련되었는지 점점 큰 의뢰가 들어온다. 정장 입은 사내들이 돈가방 들고 찾아와 스윽 내미는 게 아니다. 마치 소주 한잔 하면서 부탁하는 것처럼. "그 머시냐 걔가 쪼까 구찮스러운디 조용히 좀 시켜줘, 알았제?" 보통 이런 식이다. 부탁을 들어준 사실은 보통 다음날 신문 헤드라인이나 긴급속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로버트 드니로 닮아 맘 좋게 생긴 아저씨 인상을 풍기는 아일랜드 이민자 프랭크의 주 업무는 살인이다. 그는 부탁받은 살인으로 먹고 산다. 가족들을 먹여 살린다.


애들 어릴 때나 몰랐지 몇십 년 동안 셀 수 없이 도시에 피를 뿌렸는데 식구들이 모를 리 없다. 뉴스에서 누가 죽었다고 하면 온 가족 낯빛이 변한다. 아니 이 양반이? 아빠가 또? 프랭크는 그럴 때면 머쓱해하다가 또 연락받으면 밤늦게 몰래 나간다. 그리고 다음 날은 누가 또 얼굴에 총구멍이 나 죽어 있다. 이게 다 러셀 때문이다. 러셀(조 페시)은 굳이 표현하면 프랭크의 직업소개소 같은 역할이다. 프리랜서. 보통 단발 업무. 그러다 파견 같은 걸 제안한다. 높은 분 좀 모셔 봐. 누군데요.

지미 호파(알 파치노)는 전미트럭운송조합 위원장이다. 수많은 직원들이 그의 연설에 안광이 빛난다. 프랭크는 러셀 소개로 수십 년간 곁에서 그를 보좌한다. 어디 멀리 가면 같은 객실에서 자고 가족 모임에 참석해서 담소도 나누고. 티브이도 같이 보고 술도 같이 마시고. 어느 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다. 미국은 들끓고 있었다. 오랜 동업자라고 해도 언제든 죽일 수 있었다. 2인자는 언제든지 리더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투표권은 총구에 있었다. 누가 죽으면 다른 누군가 바로 자리를 대신했다. 지미 호파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지만 최소한의 혐의만 인정되며 5년을 복역한다. 그 사이 세상의 중심은 더 이상 지미를 향해 기울지 않는다. 하지만 지미는 여전히 자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미는 세력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다. 러셀은 프랭크를 부른다. 그러니께... 뭔 소린지 알지? 지미가 좀 불편허네. 이게 참 우리도 다 의리도 있고 지나온 세월도 있고 아끼고 싶은디... 참 그게 좀 그렇더라고? 알지? 잘 좀 말혀봐 말로 안 들으면.. 뭐 여행 좀 다녀오고. 프랭크는 단숨에 상황을 납득한다. 어떤 부탁도 이렇게 어렵진 않았는데. 러셀의 부탁으로 프랭크는 오래 같이 지낸 지미를 여행 보내야 한다.

믿을 놈 없는 세상 속에서 프랭크는 지미에게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미의 입지가 좁아지고 세상이 등 돌린 상황 속에서도 프랭크는 한결 같이 지미 곁에 있었고 그런 프랭크를 지미는 깊이 의지했다. 만인 앞에서 그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지미를 프랭크는 해결해야 한다. 타협은 없다. 프랭크의 세계는 단순하다. 부탁과 해결만 있다. 프랭크는 이 공식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다. 외딴곳으로 같이 간 지미는 이상한 느낌으로 급히 뒤돌며 여길 벗어나자고 프랭크에게 제안하지만 프랭크는 뒤통수에 총알로 답한다. 지미를 여행 보낸다.

각자 다른 혐의로 교도소에서 다시 만난 러셀과 프랭크. 나이 들어서 처음 만난 그들은 지금 오늘내일하는 할아버지다. 하나 둘 떠나고 러셀마저 노화와 함께 세상을 떠난다. 총구멍 나지 않고 죽은 것만으로도 호상이다. 프랭크 곁엔 아무도 없다. 새파랗게 젊은 수사관들이 와서 이제 다 죽은 마당에 자백이나 하라고 꼬시고 있다. 백발이 된 아일랜드 이민자 프랭크는 미국의 역사를 많이도 바꿨다. 그가 숨긴 시체와 만든 무덤만으로도 미국 조직범죄의 계보를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한 가장의 오랜 노력으로 봐주면 될까. 어림없다.

프랭크의 중요한 명분 중 하나가 가족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벌어온 돈과 타인의 피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프랭크의 딸 중 한 명이었던 페기는 지미의 죽음 이후 프랭크와 평생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거동 불편한 늙은 아비가 찾아가 사정사정 애걸했지만 소용없었다. 살인자 아버지를 둔 딸의 표정은 내내 침잠했다. 그나마 친절했던 지미 아저씨를 아빠가 죽였다고 확신이 든 순간, 딸은 자기 아버지가 더 이상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프랭크와 페기, 아버지와 딸이라는, 유일한 연결고리인 핏줄마저 그렇게 끊긴다.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프랭크는 혼자가 된다. 동료도 가족도 사라진 삶 속에서 장수라는 천형을 짊어진다.

모든 언론과 평단의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관람한 아이리시맨은 감독의 과거 갱스터 작품들과 비교할 때 많이 온순하고 평이하게 느껴졌다. 대부와 스카페이스의 알 파치노와 대부의 로버트 드니로와 좋은 친구들의 조 페시가 한 장면에서 다시 격돌하는 마법이 일어났지만 그 이상의 폭발은 없었다. 늙고 지친 얼굴들이 젊은 날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힘겨워 보였다. 범죄라는 추악한 일에서 은퇴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은 패기보다는 삶 자체가 부패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보기 흉했다. 남들보다 잘 먹고 잘 누렸을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똑같은 속도로 늙어 죽었다. 누군가는 땀 흘리며 가족과 함께 어울리며 늙어갔겠지만 그들은 누군가를 죽여가며 가족 없이 홀로 시들어갔을 뿐이다.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직업적 열성이 그들에게 어떤 불꽃을 남겨줬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들도 똑같은 속도로 늙어 죽었을 뿐이다. 보는 내내 대부가 정말 걸작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리시맨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이민자를 아일랜드 이민자보다 선호할 이유는 딱히 없다. 평생에 걸쳐 타인의 결정에 의해 움직여야 했던 초라했던 삶. 화려함을 꿈꾸던 생계 안정을 꿈꾸던, 범죄자도 결국 홀로 외롭게 늙어 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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