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면

by 백승권

스스로의 상태를 정의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다. 의식하는 일, 내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에게 알려주는 일, 점검한다. 체크한다. 괜찮냐고 묻는다. 침묵을 경계한다. 귀 기울인다. 근력이 남아있는지 계량한다. 심리 상태를 도표화할 수 있다면 침울함의 비중과 수치가 어느 정도까지 차올랐는지 감지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사 같은 말들, 표정이 너무 안 좋아요. 이따금 듣지만 인사 치례인지 실제 내가 통제하지 못한 표면을 알아본 건지 다시금 거울을 보게 한다. 그냥 피로? 곤두박질친 후 다시 멘틀을 뚫고 지하 깊숙한 어느 곳의 핵까지 도달하려 끝없이 처박히는 상태? 위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말을 걸고 싶지 않은 침묵의 질감으로 에워싸여 있나. 조성진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트를 들으면 기분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온라인의 전언들, 조직이나 주변에 의해 어떤 대우를 당했을 경우 필요하다는 신경 끄기의 기술, 나를 지키는 방법 등등. 소용 있었다면, 지금 이런 걸 적고 있을 리 없다.


임계점을 돌파한 게 언제쯤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버틴다는 자의식도 더 이상 들지 않는다. 예측불가의 위협에 순응하는 것만이 잠시나마 생존의 도모에 이로울 거라는, 정신을 몇 번 놓게 만들 정도로 끔찍했던 고통으로 익힌 학습. 당시는 헷갈렸다. 성장에 수반되는 통증 같은 건가. 이 통증을 견디다 죽으면 성장이고 뭐고 소용없는 건 아니고? 긍정이 내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용서? 복수를 미루는 일? 나를 격려하거나 기어이 견뎌낸 마지막 등수의 마라토너로 등극하는 것? 탈출구를 찾지 못해 고장 난 문고리만 돌리다가 시간을 보낸다. 괜찮은 편이야. 이 정도는 최악은 아닐 거야. 더한 지옥도 겪어봤을 거 아냐. 이건 최악은, 아닐 거야. 새로운 고통이지만 최악은 될 수 없어. 최악은 박제되었으니까. 고통의 전당에 핏물 조각상으로 헌납되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최악은 현재 실감하는 어둠의 깊이로 규정되는데. 과거를 소환한들, 뇌와 장기를 옥죄는 건 가장 최근의 사건들일 텐데. 그래서 지금이 최악.


회사생활을 하며 떨리는 손으로 두들겼던 '어느 카피라이터의 고백'은 고행록이었다. 내가 나를 그렇게 연민할 줄이야. 스스로를 그토록 가엾게 여기며 기록의 쾌감을 느꼈을 줄이야. 고통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건 몇 가지 의미가 있다.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같은 형태의 고통이 재발되는 걸 사전 경계하겠다는 점. 기록은 연약하다. 2년 전 신춘문예 수상이 그러했듯, 기록은 어느 것도 바꾸지 못한다. 강화하거나 유연하거나 의연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팩트만을 전시할 뿐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전시. 모두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해 방송하기 바쁜 이때에 이 정도 기록을 통해 팩트를 전시하는 일은 시도 자체 외에 어떤 가치와 의미도 확보하지 못한다. 톱니바퀴 안에 자꾸 구겨 넣으며 터지고 뭉개지고 분해되는 자신을 구경하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려 감상하는 예능처럼 나의 고통을 프로그램과 채널로 만들어 돌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어떤 채널로 돌려도 소재가 같다. 타란티노가 극찬한 호스텔의 어떤 건물 안에서 벌어진 일들처럼. 내보내 달라고 문을 쉼 없이 두드리는 절규를 볼륨을 0으로 해놓고 보고 있다. CCTV처럼 모든 게 라이브, 모든 게 진짜, 모든 게, 호흡을 멈춘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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