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했다

by 백승권

‪얼마 전부터 실패란 단어를 떠올린다. 과정인지 결과인지 단정 짓기 어렵지만 확실한 건 실패라고 스스로 인정된다는 점이다. 지난 몇 달간 나는 내가 선택한 시험을 치렀고 오랜 시간 복기해봤으며 여러 측면으로 스스로 평가했을 때 실패했다. 다른 표현을 찾기 어렵다. 실패했다. 대안과 재시험은 없다.‬


어떤 실패. 실패의 과목. 실패의 근거. 깨진 유리를 줍는다. 내가 깼으니까. 손이 베인다. 피는 닦으면 된다. 유리조각은 각각 모양이 다르다. 이름을 붙여볼까도 하지만 관둔다. 실패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냄새도 질감도 없다. 실패는 기억만 있다. 기억, 꾸깃한 경험, 흐릿한 이미지들을 기워 실패라고 부른다.

과거 비슷한 경험과 감정상태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실패란 단어는 없었다. 떠올리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실패가 아니었다. 실패로 기억되지 않는다. 지금은 다르다. 맞선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과 노력과 시간을 모조리 총동원했다. 그래서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자원을 다 썼고 여분은 없다. 다른 출구도 기운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실패다. 신체와 정신의 일부가 완전히 고갈되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고갈되었던 사실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실패는 이럴게 기록될 만큼 명징한 사실이 되었다.

실패, 그다음은? 없다. 모르겠다. 계획이 있다한들 실패가 안실패 덜실패 그만실패로 바뀌는 건 아니다. 지금 실패를 발견하고 실패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 집중한다. 등짝에 실패 엠블럼을 붙인 유니폼을 입을 건 아니지만 지금은 실패의 상태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실패가 예정된 교통수단으로 잘못 환승한 건지, 내비게이션을 잘못 찍어 실패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지, 계약서에 싸인은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온통 실패할 거란 내용이었는지. 모르겠다. 누가 내 상태에 대해 뭐라고 해도 듣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실패에 도착했고 다음 정거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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