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는 업에 대하여

자기소개서를 쓰려다가.

by 백승권







생계와 생존, 자아실현을 위해 일은 필요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일은 그 이상이기도 합니다. 10년을 넘게 한 가지 일을 하다 보면 관점은 눈앞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제게, 카피란, 카피라이터란, 이번 삶의 하나의 사명과도 같습니다. 어린 날 스스로 길을 정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언어로 축조한 모래성을 수없이 무너뜨려 왔습니다. 이 과정들을 통해 저는 작아졌고 카피라이터라는 캐릭터는 강해졌습니다. 거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텍스트 중심으로 해석하고 사고하고 개념화시킵니다. 언어화되지 않는 대상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건 어쩌면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구글, 이케아, 현대카드, 재규어랜드로버, 랑콤, 조르지오 아르마니, 삼성전자, 디즈니, 블리자드 등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 서비스들이 저를 거쳐갔습니다. 생각하고 쓰고 그리며 행복했습니다. 이들의 방향과 타인들의 동선을 정할 권한이 적어도 잠시 동안만은 제가 독점하고 있다는 착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협업의 기적을 배우기도 했고 동료들에게서 문서와 파일을 넘어선 뜨거운 인간적 공감대를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카피는 광고는 제게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역사이자 찬란한 기억의 가장 극적인 소재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힘든 적은 있어도 업무량으로 힘든 적은 드물었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고 계속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일을 좋아하고 더 제대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바라볼 때, 카피는 광고라는 완결된 콘텐츠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차원으로 볼 때 카피는 그 광고를 받아들이고 각인시키고 추후 브랜드 경험으로 이어지는 매개체의 전부가 되기도 합니다. 쉽게 쓰이는 카피는 있어도 쉽게 완성되는 카피는 없습니다. 만인이 따지고 개입하고 재가공하는 과정 속에서 끝까지 스스로의 운명을 지켜낸 카피는 때론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저 역시 광고라는 세계 속에서 카피를 써내는 운명이야 말로 제가 앞으로도 오랜 기간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껏 수없이 서로 다른 이해와 의견,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싸워왔고 앞으로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한 번쯤 쉽게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새로운 시작 앞에 다시 서 있습니다. 카피의 힘을 믿습니다.





이전 13화영화가 없으면 글을 못 쓰는 현상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