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만 빼고 퇴사해25

중소기업 지역 청년 연쇄 퇴사 소설

by 장안녕

고성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속초로 넘어갈 즈음에 인오는 인서의 전시회 소식을 듣고 대구로 내려갔다. 문화·예술기관에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전시회 첫날에 아빠까지 참여해 인오네 가족은 잠깐이지만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리고 셋째 날에 인서는 화랑의 대표로부터 계약 제안을 받았다. ‘명화랑 대표 한명아’라고 적힌 명함을 본 인오는 동명이인이 아닐까 싶어 블로그에 접속을 했다. 화랑의 대표는 자신이 아는 그 얼굴이었다. 인서는 퇴사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제2의 삶을 선택했다. 어릴 때부터 인서는 꿈을 꾸었지만 자라는 동안 재능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림으로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보다는 그저 취미나 소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음을 내려놓고 있던 찰나에 뜻밖의 기회가 왔다. 인서는 사람이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일의 결과는 절대적으로 운이 좌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운은 사람이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가는 순간에 나타났다. 인서는 매순간 뭐라도 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과거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어 뿌듯했다.

예주는 인오에게 다시 드럼을 칠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 개업 1주년을 맞아 예주가 공연을 열 예정이라고 했지만 인오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농한기를 맞아 합류를 하기로 결정한 윤혁과 원규는 인오의 불참 소식에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주율의 소식도 들려주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인오의 짝꿍이었던 원주율. 그는 이름과 다르게 수학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재능을 갖춘 아이였다. 주율은 방송부 활동을 했기에 밴드부와도 각별했다. 주율은 인오, 윤혁, 원규와 떨어지기 싫어 대봉상고에 진학을 하였다. 전교 10등 안에 들었던 주율은 서문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서울의 대기업에 입사를 했다. 지역에서 대학교를 나와 취업을 통한 서울 입성의 영광은 아주 찰나에 불과한 일이었다. 실 수령액 200만원 후반의 웝급으로 생활을 하기에는 비참했다. 주율이 입사한 해에도 회사에서는 영업 손실을 기록했고 상여금은 구경할 수 없었다. 그 다음해에 드디어 실 수령액 300만원을 겨우 넘겼지만 주거비와 생활비의 상승폭이 급등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임금 동결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회장의 연봉은 기업의 영업 적자와 무관한 세상이었다. 주율은 지금의 연봉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는 일의 수지타산을 따져보고 이직을 알아봤지만 높은 벽만 실감할 뿐이었다. 그리고 주거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는 서울 토박이 동료를 보면서 자신의 태생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불온한 생각을 고쳤다. 서울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서울에 집이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주율에게는 향수병이 도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땅에 혼자 올라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떠올리니 공허하기만 했다. 대구로 다시 내려가면 스스로도 패배자라고 인정하는 꼴이어서 주율은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만 바라보기로 했다. 자신이 집세를 내서 부유한 노인의 노후자금을 충당해주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 주율은 고향으로 내려가 공부를 해서 공기업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회사에 퇴사 통보를 했다.


다음 주에 주율이 퇴사를 하고 내려오면 인오는 그를 만난 다음에 속초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다가 접었다. 주율을 떠올리자 인오는 껄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서울의 대기업에 다녀도 주율은 고달프다는 얘기만 했고 인오는 징징거림과 기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번은 그런 속마음을 주율에게 표현한 적이 있었고 둘은 거리감이 생겼다. 속초로 돌아온 인오는 주율이 서울 살이의 힘겨움을 토로할 때 공감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못남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대구에 내려갈 일이 있을 때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인오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유튜브에 접속을 하여 알고리즘에 따른 이런저런 영상을 훑어보다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 방송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썸네일에 하진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맛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지역 청년들’을 주제로 하진이 청도에서 공장을 짓고 식혜를 수출하는 모습이 등장하였다. 영상 시청을 끝낸 인오는 하진에게 전화를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하진은 카페의 고장으로 거듭난 청도에서 공장에 이어 자신만의 특색 있는 가게도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날. 곤 부장은 지역 신문을 읽다가 하진이 등장한 기사를 봤다.


“흑임자 식혜? 이게 해외에서 그렇게 잘나가? 회사에 다닐 때는 이런 걸 제안하지도 않고. 참나.”


곤 부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다음 장을 넘겼다.



- 사업을 하면서도 내 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 저도 처음부터 이 일이 저랑 잘 맞는지는 알 수 없었죠. 그런데 하기 싫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그때 확신을 했죠. 그리고 내 길이 맞는지 아닌지는 심장이 알더라고요. 사람들은 머리가 아닌 몸의 감각이나 반응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오는 속초를 떠나 양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즈음 진성이 조그마한 매체에 웹툰 ‘야간 편의점’을 정식으로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웹드라마 제작 의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더불어 SNS에는 짤막한 그림을 올리고 있는데 처음으로 광고 의뢰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와 인서가 찾아왔다.


“인오야, 이거 봐라. 너희 누나 그림이 들어간 달력이다.”


엄마는 대구의 공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지역에서 활동을 하는 화가의 작품으로 달력을 만드는 곳이 몇 군데가 있다며 얘기를 덧붙였다.


“은행 출입문 바로 옆에는 인서가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인서의 작품 감상을 위해 엄마는 굳이 볼일이 없어도 은행에 매일 찾아가기 시작했다고도 말했다.


“참, 인영이 퇴사했다…”


“왜?”


인서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그게 뉴스에도 나왔는데…”


엄마가 말을 거들기 시작했지만 끝을 얼버무렸다.


“그 뭐고? 이사장인가 조합장인가? 아무튼 그 종자가 조회시간마다 직원들한테 장기자랑을 요구하고 평가도 하면서… 아무튼 그런 수모를 당하다가 나왔지.”


인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직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다가 천기식품을 비롯한 각종 중소기업을 떠올리며 수긍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영은 우체국 계리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이 지난 다음에 인오는 난데없는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곤 부장이었다. 그는 인오에게 지역 방송국에 동영상을 제보했느냐며 추궁을 했고 끝으로 윤 대리의 행방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하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인오는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 천기식품에는 매일 같이 소비자 단체가 찾아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팔공산 약수로 막걸리를 만든다는 허위 광고를 일삼은 업체의 제품은 불매해야 한다는 구호가 매일 울렸다. 인오도 하진도 동영상의 제보자가 아니라면 그 이전에 다녔던 직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윤 대리의 전화는 결번이었고 인오는 문득 그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날 저녁, 인오는 캐나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찬형은 대뜸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을 불렀다. 그 노래는 명덕 대동제에서 인오가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찬형은 오랜만에 명덕 대동제의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찬형에게는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가 역시 이민을 선택한 처지였다. 그리고 찬형은 자신의 집 근처에 대구에서 유명한 막창과 찜갈비 등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생겨 고국을 향한 향수를 달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음식점 주인도 대구에서 회사를 다녔대. 식당 경력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엄청난 맛집이야.”


찬형은 그 식당의 모습과 음식을 비롯해 주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오에게 보냈다. 사진을 살피던 인오는 식당의 주인을 보고 그만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인오는 오랜만에 윤 대리와 통화를 하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오는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


“그림 그리는 일도 힘들지 않나?”


인오가 인서에게 물었다.


“회사 다닐 때는 야근, 지금은 그림 때문에 밤새고… 그런데 내가 하고 싶고 잘 맞는 일은 버거워도 괴로워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더라.”


인오는 인서의 얼굴이 전과 달리 좋아진 모습을 보면서 그림에 담긴 힘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곧 명절이 다가오네. 이맘때면 인오가 천기식품에서 종합명절선물을 들고 와서 좋았는데…”


“아, 그게 뭐가 좋은데? 종합 명절 선물이 된장, 쌈장, 고추장이잖아.”


“얼마나 실용적이고? 네가 회사를 관둬서 명절마다 그건 아쉽다.”



같은 시간. 세남저축은행 직원인 동현은 올해도 천기식품의 종합 명절 선물을 받았다. 지점장의 친분 관계로 인해 명절 선물은 항상 된장, 쌈장, 고추장이었다. 명절 선물 때문에 심각하게 퇴사 고민을 하던 동현은 이내 중고시장을 떠올렸다.



인서는 10년이 넘은 아파트의 가격도 1평에 1,000만원에 육박한다고 했다.


“재건축에 들어간다는 얘기라도 나왔나?”


“아직 그런 소리는 없다. 재건축 하면 우리는 어차피 여기에 돌아오지도 못하잖아. 그리고 요즘 아파트가 너무 많이 생겨서 재건축을 진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차라리 미리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알아보고 있다.”


“10년이 넘은 아파트가 1평에 1,000만원이면 비싸지 않나?”


인오는 대구 지역 신규 아파트의 분양가를 검색했다. 1평에 평균 1,600만원을 넘는다는 기사가 보였다. 그리고 어느 부동산 카페에는 대구의 신규 아파트 분양가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수준이라며 한탄하는 게시물과 댓글이 넘쳐났다. 그곳은 인오가 평생 접할 일이 없는 상위 10%에 해당하는 세계였다. 인오는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느끼며 검색창을 닫았다.



예주의 가게에서 개업 1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는 날. 인오는 영상 촬영을 맡은 주율을 만났다. 두 사람은 윤혁과 원규를 통해 근황을 들어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하면서 어색하게 말문을 텄다. 주율은 얼마 전에 공기업에 낙방을 하여 연말까지만 공사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공기업에 재도전을 하고도 아무런 결과가 없다면 중견기업을 노리겠다고 했으며 인오는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건넸다.


익스의 ‘잘 부탁드립니다’를 시작으로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 롤러코스터의 ‘너에게 보내는 노래’ 등을 부르는 예주의 모습을 보며 인오는 마음이 놓여 다행이었다. 정식 공연이 끝나고 예주는 인오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인오는 즉석에서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의 ‘너클볼 콤플렉스’를 불렀다.



어느덧 인오는 강릉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여전히 파도에 몸을 적시는 삶을 살고 있다. 첫 번째 파도를 무사히 통과하면 어김없이 두 번째 파도에서는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첫 번째 파도는 뭣도 모르고 얼떨결에 누린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파도에서는 시련을 겪을 수밖에. 평소와 같이 파도를 타던 어느 날. 인오는 역대 가장 높은 파도를 마주했다. 그 파도 덕분에 내일도 모레도 인오는 계속 파도를 타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더 높은 파도가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인오는 바다를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끝 -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25화나만 빼고 퇴사해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