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덕수궁 돌담길, 그 계절에22
2008년 첫사랑 짝사랑 멜로 연애
다원은 침대에 누워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은석과 전화를 주고받던 몇 몇 장면을 떠올리던 다원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에는 잡지가 있었고 다원은 잡지를 펼쳐 은석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는 어떤 사연이 있나봐요?
- 사연이라… 제가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한국에서 다녔는데 그때 만났던 여자아이죠.
- 강작가님이 많이 좋아했나봐요. 그림으로 그릴 정도면.
- 그 친구가 자기 얼굴 그려달라고 했는데 이제야 완성한 셈이죠. 사실 그 때도 그 친구 얼굴을 그리고 있었는데 너무 아니라서 보여주기가 그랬거든요. 지금도 인물화는 자신 없어요.
- 우와! 그렇게 잘 그려주고 싶을 정도로 작가님이 좋아했던 소녀라니. 엄청 부러운데요. 그럼 그 소녀는 지금 뭐하고 있나요?
- 그러게요. 뭘 하고 있으려나.
- 소식은 전혀 모르나요?
- 그해 여름에 헤어지고 저는 독일에 갔거든요. 한번쯤은 보고 싶다는 생각한 적 있는데 그 친구는 저랑 생각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 혹시라도 진짜 만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 만난다면… 엄청 좋겠죠?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다음날, 다원은 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 6시쯤 대한문 앞에서 만날까? 오후에 취재하러 가는 곳이 그쪽이라서.
- 나도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이 그 근처인데. 잘 됐네. 그때 보자.
- 알았어. 끊을게.
전화를 끊고 나자 다원은 긴장이 풀려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은 오후, 다원은 가을날의 기운을 느끼며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맞은편에서 은석은 사진기를 들고 돌담길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 은석이 구도를 잡고 사진기를 누르는데 갑자기 다원의 모습이 담겼다. 다원은 자신이 사진에 찍혔는지 모르고 돌담길을 계속 걷다가 앞을 바라봤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은석을 보고 다원은 굳어버렸다. 은석도 놀랐는지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있었고 마치 온 세상이 멈춰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이기 시작했다. 은석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고 했고 다원은 손으로 눈물을 훑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보이려고 애썼다. 다원이 먼저 은석에게 다가갔고 은석은 마중을 가듯이 따라 다원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드디어 가까이서 마주했다. 막상 만나니 어색한 기운이 감돌아 쑥스러운 웃음만 지었다.
“잘 있었지?”
은석이 먼저 말했다.
“응. 너도 잘 지냈지?”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네.”
“그러게.”
다원이 웃는 모습을 보이자 은석은 그제야 안심하며 표정이 더욱 풀렸다.
“10년도 더 넘었구나. 먼저 연락줘서 고마워.”
다원이 말했다.
“고맙기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다시 웃었다.
“저녁 먹어야 하지?”
은석이 말을 꺼냈다.
“음… 맥주 생각난다.”
“마시러 갈까?”
“내가 자주 가는 집 있는데 거기로 갈래? 돌담길 지나서 있거든.”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시작했다. 은석은 길을 걸으며 돌담길 주변의 가을 풍경을 바라봤다.
“가을 덕수궁 참 좋지?”
“응, 분위기 있고 마음에 들어. 가을 덕수궁은 이제야 보네. 봄, 여름에 와 봤고 이제 겨울에 오면 되겠네.”
“눈 올 때도 정말 예뻐.”
“겨울 덕수궁 꼭 보고 싶다.”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며 덕수궁 돌담길을 계속 걸었다.
수제 맥주를 마시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제 전화 받고 잠을 못 잤거든. 그래서 좀 엉망이야.”
그렇게 말하며 다원은 수줍게 웃었다. 은석은 그런 다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열일곱… 그때 우린 엄청 어렸지.”
다원이 말을 꺼냈다.
“그 시절에는 그게 왜 좋은 줄 몰랐을까?”
“그러니까. 나이 들수록 후회만 가득하고. 에휴.”
“만나는 사람은 있어?”
은석이 다원에게 말했다.
“아니. 없어.”
그 말을 듣자 은석은 갑자기 마음 한편이 시린 느낌을 받았다.
“왜 없어?”
“뭐… 일이 바쁘다보니 시간 내기도 힘들고… 막상 만나도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너는 만나는 사람 있어?”
“나도 없어.”
“너는 왜?”
“작품에 매달리다보니 그렇지. 뭐.”
“우리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네 소식 실려서 접할 때마다 너한테 참 미안하다는 생각만 들더라.”
다원의 말을 듣고 있던 은석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쳤다.
“미안할 게 뭐 있어.”
갑자기 다원의 전화가 울렸다. 다원은 은석의 눈치를 살폈다.
“전화 받아봐.”
“응. 선배, 왜 그러세요? 네?”
다원의 목소리는 심각했고 은석은 덩달아 초조해졌다.
“어떡하지? 취재하러 가던 선배가 교통사고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갔거든. 그 취재 내가 대신 가야하는 상황이라…”
“가봐야지.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미안하네.”
“내일이라도 보면 되잖아.”
“내일? 그럼 내일 내가 다시 연락할게. 먼저 가서 정말 미안.”
다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석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날 밤, 은석은 호텔 객실 침대에 걸터앉아 다원의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를 넘겨봤다. ‘꼭 가봐야 할 서대문 형무소’라는 제목의 기사와 사진이 보였다. 그리고 ‘글 박윤, 사진 손다원’이라고 적힌 글자에서 다원의 이름과 다원이 찍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진을 한 동안 정성스레 응시했다. 은석은 또 다시 잡지를 넘기며 다원의 이름과 다원이 찍은 다른 사진을 찾아서 봤다. 다원의 이름과 사진은 몇 번 더 나오고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은석은 잡지를 덮었다. 그리고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틀어놓고 야경이 보이는 창가로 이동했다. 창가를 한동안 바라보던 은석은 상념에 잠겨 아주 잠깐이었지만 다원을 만났던 순간을 오래도록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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