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덕수궁 돌담길, 그 계절에21
2008년 첫사랑 짝사랑 멜로 연애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괴로워하며 다원이 눈을 떴다. 그리고 어젯밤 명준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또렷하게 생각이 나네. 친구로 만나다가 연인…”
다원은 머리를 더욱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난 친구 이상으로 본 적이 없어. 명준이는 날 언제부터…”
다원은 명준이 좋아하는 사람이 연애를 하고 있지만 마음을 못 접겠다고 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아직도? 그럼 더 불편해지는데. 남자친구나 만들어야겠다.”
다원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아주 익숙한 명준의 뒷모습이 보이자 고민에 휩싸였다. 한편 버스정류장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던 명준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다 멈춰 서 있는 다원을 발견했다. 다원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기로 다짐을 하며 명준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다.
“지금 가는 거야?”
“오늘은 오후 강의라서. 너도?
“응. 나도 그래.”
“어제 말이야…”
명준이 어제라는 말을 꺼내자 다원의 심장 박동은 커지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마셨나봐.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머리는 엄청 아프고…”
“그…랬어? 나도. 요즘 따라 자꾸 그러더라.”
“너도 그래? 아무튼 큰일이야.”
“그러니까.”
두 사람은 서로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확인하자 다행이라 여겼다. 학교로 가는 버스가 오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로 다원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겨 교정을 같이 다니기도 했다. 명준 역시 여자친구가 생겨 번화가를 거닐었다. 입대를 하는 명준의 곁에는 그를 배웅하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다원은 남자친구와 다투는 일이 빈번해졌다. 시간이 흘러 명준은 제대를 하여 복학생이 되었다. 다원이 졸업 사진을 찍을 즈음 명준은 여자친구와 말다툼을 하더니 갈라섰다.
월간지를 발행하는 ‘빛과 그림’에 사진기자로 취직을 한 다원은 신입사원이라 복사기에 종이를 채우고 비품실을 정리하는 잡다한 일을 도맡았다. 어느 날은 부장이 원교 교정을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원은 정리를 마무리하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책상에 놓인 기사를 펼쳐 읽다가 시선을 한 곳에 두었다. 글자를 보면 ‘독일 소식 – 독일 현지에서 열리는 신진작가 전시회 … 참여 작가 윤석진, 강은석’이라고 적혀있는고 사진도 같이 실려 있었다. 다원은 은석의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독일에서 잘 있구나.”
혼잣말하듯 얘기하는 다원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였다.
다원은 그 기사를 읽고 몇 년이 흘러 자신이 은석의 그림 앞에 서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내부 전시실에 있는 은석의 그림은 총 4점이었다. 첫 번째는 덕수궁 돌담길 앞에 서 있는 다원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는 효창공원의 다원이었고 세 번째는 장충단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다원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청계천의 야경과 다원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림에서 얼굴 묘사는 자세하게 하지 않았지만 다원의 느낌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다원은 그림 앞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전시 관림이 끝나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다원은 복도로 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누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느낌이 들어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나무가 많이 우거진 곳으로 가서 다원은 가까스로 진정을 하고 숨을 다시 크게 쉬어본 다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날 밤. 다원은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걸으며 밤공기를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전화 한통이 걸려왔는데 발신자 정보는 없었다. 다원은 전화기를 쳐다보며 의문을 자아냈다.
- 여보세요?
다원이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 여보세요?
이번에도 상대방의 반응은 없었고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어 다원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 다원아.
은석의 목소리를 듣고 다원은 전율을 느꼈다.
- 나 은석인데.
- 어, 은석아. 오랜만이야.
- 그러게. 오랜만이지. 전화번호가 맞구나.
- 참,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한 거야?
- 오늘 서경이 만나지 않았어?
- 아, 서경이가 가르쳐줬구나. 둘은 연락하고 지냈어?
- 최근에 알게 됐어. 넌 사진기자라고 하던데.
- 응, 조그마한 회사야. 나 지금 덕수궁에서 나오는 길인데. 전시회 보고 왔어.
- 진짜? 내 그림 봤어?
- 응. 잘 그렸더라.
- 그냥 하는 소리 아니지?
- 마음에 들던데.
- 네가 내 작품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 많이 해봤는데… 그 날이 오늘일 줄이야.
- 그러게. 나도 네가 그린 내 모습을 이렇게 다 보다니… 그럼 전시회 때문에 잠깐 한국에 온 거야?
- 응. 나 지금은 전주에 있어.
- 전주?
- 다음 전시회 때문에 왔는데 불러주는 곳이 좀 있어서 한국에 당분간은 있을 예정이야. 내일 서울에 올라가는데 혹시 시간 돼? 한번 만날래?
- 내일? 저녁 늦게 시간나지 싶은데.
- 나는 내일 일정 없으니까 언제든지 상관없어.
- 그럼 내가 일정 끝나면 연락할게.
- 알았어. 나 지금 다른 전화 들어와서 끊어야겠다.
- 그래. 내일 만나자.
다원은 전화를 끊고 나서 ‘은석’이라는 이름을 입력하며 전화번호를 저장하였다. 시청역을 향하는 다원의 발걸음은 덩달아 가벼웠다.
같은 시간, 명준은 다원의 집 근처에 있었다.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던 찰나에 다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와?”
“너도 늦었어? 아니면 나 기다린 거야?”
다원이 이 시간에 명준을 만나 조금 놀랐다.
“둘 다.”
“무슨 볼 일 있어?”
“그냥. 얼굴 못 본지 오래됐잖아.”
“나… 덕수궁에 갔다왔어. 그림 보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은석이가 나한테 전화했다.”
“어떻게 알고?”
“서경이 알지? 걔가 알려줬대. 서경이는 나랑 몇 시간 전에 만났는데 가르쳐줬나봐.”
“은석이랑 전화하니까 어땠어?”
“뭐… 처음에는 좀 놀랐는데… 내일 은석이가 보자고 했어.”
“약속 잡은 거야?”
“응. 갑자기 생각해보니 잘 한 건지 뭔지 모르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예전에 그렇게 헤어졌는데 좀 그렇잖아. 또 진짜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떨리겠지? 무슨 말이 먼저 나올까? 고민이네. 내일 만나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명준은 그 말을 듣고 착잡해졌다.
“다시 만나면…”
명준은 들릴 듯 말 듯 얘기했다.
다원이 갑자기 명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명준은 다원을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우리 스무 살 때…”
그렇게 입을 뗀 명준은 여전히 다원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스무 살 때 내가 너한테 고백한 적 있는데 모르지?”
그 말에 다원은 그날의 기억이 떠올렸다.
“그리고 말이야…”
명준의 말에 다원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네가 은석이 처음 만났던 날. 그러니까 열일곱 살 때. 그날 은석이 만나기 전에 골목에서 나랑 부딪혔어. 그 이야기를 고3때 하려고 했거든. 지금에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얘기했어도 우리 사이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다원은 그제야 그때 누군가와 부딪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맞아. 그랬어. 몰라봐서 미안해.”
다원은 말을 꺼내놓고 뒤늦게 괜한 말을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명준은 갑자기 다원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을 한 다음에 명준은 다원을 놓아주었다.
“갈게.”
그 말을 남기고 명준은 먼저 뒤를 돌아서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원은 명준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명준을 다시 불러 붙잡아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다원은 책상 앞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가 명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명준은 큰마음을 먹고 바(Bar)에 들러 평소에는 쳐다도 보지 않는 보드카를 연달아 마셨다. 그리고 때마침 매장에서는 버즈의 ‘어쩌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만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소파를 향해 걷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명준의 어깨가 들썩였고 괴로움이 얼굴에 묻어났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