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덕수궁 돌담길, 그 계절에20
2008년 첫사랑 짝사랑 멜로 연애
2010년.
다원의 엄마가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재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고3이 된 다원은 엄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엄마, 나 사진 전공하면 어떨까?”
“뭐라카노? 야가. 이제 와서 뭘 해?”
엄마는 다짜고짜 성질을 냈다.
“디자인보다는 사진 찍고 싶어.”
“사진 찍어서 뭘 할 수 있는데? 디자인 공부해서 광고회사에 들어가기로 했나? 안 했나? 안 되겠다. 오랜만에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맞아 터져야 정신을 차리재?”
엄마는 예전과 달리 쇼파 밑에서 야구 방망이를 금방 찾았다. 다원은 놀랄 겨를도 없이 집에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안 서나?”
효창동 골목은 2년 전의 모습과 비슷했다.
집에서 나온 다원이 부리나케 달리다가 길이 꺾이는 곳에서 명준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놀랐다.
“어디가?”
“나 죽을지도 몰라.”
다원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먼 곳을 보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는 엄마가 보였다.
“손다원? 거기 안 서나?”
엄마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쳤다.
엄청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명준은 다원을 데리고 피신할 곳을 찾았다. 두 사람은 어느 골목 구석에서 최대한 몸을 벽에 대고 앉아 있었다.
“손다원!”
또 한번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은 움찔거렸다. 잠시 후, 다원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는 소리의 크기가 작았다.
다원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내 이름을 왜 저렇게 동네방네 떠나가라 부르는 거야? 이름을 바꾸던가 해야지. 목청도 엄청나네.”
“말투가 사투리 쓰시는 것 같던데.”
“우리 엄마… 대구 사람이야. 나보다 서울에 더 오래 살았는데 서울말을 잘 못 써.”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넌 사투리 쓸 줄 알아?”
“음… 명준아, 밥 뭇나?”
그 말을 듣고 있던 명준이 피식 웃었다.
“왜 그래?”
“진짜 못한다.”
다원은 명준을 한 대 때렸다. 명준은 맞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야!”
“알았어. 갑자기 그 생각난다.”
명준이 겨우 진정을 하며 말했다.
“뭔데?”
“너 저번에도 이런 적 있잖아.”
“저번에?”
다원은 순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때도 넌 도망가고 너희 어머니는 야구방망이 들고 너 쫓아갔는데… 한 2년 전인가?”
“2년 전? 그때 나랑 엄마를 봤다고?”
“응. 우리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지 싶은데.”
그 말에 다원은 사진기를 들고 돌담길 주변을 촬영하고 있던 은석을 떠올렸다. 그리고 은석과 처음으로 눈을 맞춘 순간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때 은석이 처음 봤어.”
다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
“못 잊은 거야?”
다원을 멍하니 보던 명준은 조심스레 말을 했다.
“ 아니. 네가 꺼낸 2년 전 얘기 들으니까 그때 그런 일이 생각나서… 그냥. 뭐… 독일에서 학교 다니며 잘 살고 있겠지?”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참. 원서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었어.”
다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원서 때문에?”
“내가 사진 전공하고 싶다고 얘기했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야.”
“학교는 정했어?”
“아니. 넌?”
“나도 아직.”
“3년 동안 같은 학교 다녔잖아. 대학교도 같이 다니자.”
다원을 명준을 봤다.
“3년 동안 학교에 같이 왔다갔다한 정이 있잖아.”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넌 마포대학교에 안 갈 거야?”
“학교 이름이 뭐 중요해? 대학교도 같이 다니자.”
“같이 다닌다 쳐도 너 군대 가잖아.”
명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2년 정도는 같이 다닐 수 있겠다.”
그렇게 말하며 명준은 까마득한 앞날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몇 달 후.
명준은 책상 앞에 앉아 다원과 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발표 확인 다 해봤어?
- 용산대만 붙었어.
- 나도 용산대만 합격했는데.
- 뭐? 왜? 마포대는 떨어졌어?
- 실기를 망쳤나봐.
- 그래서 용산대 다닐 거야?
- 너는?
- 나는 거기밖에 안 붙었으니까 가야지. 어쩔 수 없잖아.
- 나도 뭐 어쩔 수 없이 거기 가야겠지?
명준의 책상에는 용산대학교, 마포대학교, 서초대학교의 합격 통지서가 있었다.
명준의 학과 1학년 모임이 열렸다. 술집 안에서 카라의 ‘Jumping’이 흘러나왔다. 명준을 비롯한 신입생들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흥겨운 분위기였다.
같은 시간, 어느 술집에서는 용산대학교 사진동아리 정기 모임도 열렸다. 내부에서는 2PM의 ‘I’ll be back’이 나왔다. 다원을 비롯한 회원들이 모여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행사가 끝난 뒤에 명준은 약국을 찾아 숙취해소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뒤이어 흐릿한 정신의 다원이 약국에 들어와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은 뒤에 자리를 찾다가 명준을 발견했다. 약을 마신 명준도 정신이 드는지 다원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마셨어?”
다원이 명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별로 안 마셨는데. 너는?”
“나? 나도. 지금 멀쩡하잖아.”
“그래? 나도 맨 정신이야.”
다원은 명준의 손에 들린 숙취해소 음료를 봤다.
“다 마셨어?”
명준이 쥐고 있던 숙취해소 음료를 흔들던 다원은 자신의 약병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 좀 살겠다.”
명준은 그렇게 말을 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원은 그런 명준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은 효창동 골목을 걸으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사진 동아리는 할 만 해?”
“응, 전공보다 훨씬 좋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다원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 왔네.”
“저기 다원아…”
“응?”
“할 말이 있어.”
다원을 보는 명준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뭔데?”
다원도 마찬가지로 명준을 봤다.
“내가 너… 엄청 좋아하거든. 우리 사귀면 안 될까?”
그 말을 듣고 다원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했다.
명준은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명준아 그게… 너랑 나는 안 되겠어.”
“왜? 뭐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지내자.”
명준은 갑자기 다원의 손을 잡았다. 다원은 엄청 놀라다가 손을 뿌리쳤다.
“명준아. 네가 내 과거 연애사를 다 아니까 그게 걸려.”
“그게 뭐 어때서?”
“난 좀 불편하거든.”
명준은 뭔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무튼 미안해.”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혹시 네 생각 바뀌면 그때 다시… 아니다. 잘 들어가.”
명준의 목소리에는 갈수록 힘이 빠졌다. 그리고 서글픈 표정도 감출 길이 없었다.
자신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명준은 주저앉았다. 그리고 김동률의 ‘취중진담’을 부르기 시작했다. 감정이 울컥해지는지 명준은 더 이상 노래를 잇지 못했다. 후회감과 걱정이 가득하던 그는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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